"그래서 말이지! 이번에는 도색이 끝내준다니까? 전에 나왔던 버전이랑은 차원이 다르다고. 아 물론 전에 나왔던 버전도 나쁘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러니까 이건 …"


 벌써 몇 번째 듣는 이야기더라. 마유는 미코시바가 손에 조심스레 올려두고 있는 모에니메이션의 여주인공 피규어를 감정없이 바라보며 미코시바가 저 이야기를 벌써 몇번째 반복중인가 떠올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역시 생각하는 것도 귀찮아져서 마유는 대충 어림잡아 열번은 들은 것 같거니 짐작했다. 저런 플라스틱덩어리가 뭐가 좋은걸까, 하고 입에 올렸다간 아무래도 미코시바가 충격받아서 그것은 관두기로 했다. 하지만 주말에 애써 사람을 불러다 놓고 어제 온 피규어에 대해 자랑만 늘어놓고 있다니. 한시간 걸려 미코시바의 집에 도착한 의미가 없지 않은가. 


 마유는 벽시계를 바라보며 더 이상 들어주고 있다가는 아마 저 피규어의 픽셀단위 하나까지 외우게 될 것 같다고 생각해서 미코시바의 말을 가로막고 중간에 이 집에 온 본 목적을 여과없이 말했다. 


"형. 키스해주세요."


아, 당황했다. 미코시바는 귀까지 붉어진 마유의 얼굴을 보며 펑-하고 터지는 효과음이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 여기서 안아버리고 싶지만 조금 화낼려나. 역시 미움받는 것은 싫다. 사과하는 것에 익숙치 않으니 애초에 미움받고 싶지 않다. 그래도 조금, 가능하면 조금 더 닿고싶다.


 마유는 손을 뻗어 미코시바의 귓볼을 만지작거렸다. 귓볼이 이렇게 뜨거운 곳이었나. 몸까지 덜덜 떨고있는 미코시바를 보며 조금 가엽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조금 더 괴롭히고싶어지는 것을 보니 아마 치요의 말대로 자신은 도S인지도 몰랐다. 아직 제대로 실험해 본 건 아니지만 말이다.


"아, 아하하. 그...그래서 이번에 옥션에서 운좋게 구입한 건데 중고치고.."


 미코시바는 몸을 덜덜 떨면서도 마유의 말은 못들은 척 어물쩡 넘기려는 속셈인지 다시 피규어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이제는 머리끝까지 붉어져버렸는데도 이 사람은 내가 속아넘어가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마유는 귓볼을 좀 더 노골적으로 지분대다가 조금씩 미코시바를 벽 쪽으로 밀었다. 등에 벽이 닿았을 때 미코시바는 거의 울 듯 한 표정이 되어 있어서 마유 안의 가학심을 대놓고 쿡쿡 찌르고 있었다. 


"형. 키스해주세요."


 작년 이맘때 쯤 사귀기 시작해서 곧 1주년을 맞이하는 이 커플은 한달 전에 뽀뽀도 겨우 한 상태로, 그것도 대학 동기들과 술자리를 하고 온 미코시바가 분위기에 취해 어쩌다 한 것 뿐이지-그것도 키스도 아니고 뽀뽀였고- 다음 날 기억이 돌아오자 미코시바는 무진장 부끄러워서 거의 일주일 간 마유를 피해다녔다. 마유 자신도 스킨쉽이 무척 하고싶어 미치겠다거나 이런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이렇게 누구 하나 좀 더 발전하려 하지 않으면 분명 뽀뽀만 하다 끝나는 커플이 될 거라고 얼마전부터 경각심이 들었기 때문에 조금만 분위기가 잡히려고 하면 들이댔지만 막상 키스 한 번 하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이 사람의 이런 부끄러워하는 면 때문에 끌린 것도 있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지 않아? 하고 마유는 사실 조금 심통이 나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미코시바로부터 오늘 집에 놀러오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오늘이다! 라고 생각하고 날 잡고 온 건데.. 오자마자 거의 세시간을 피규어에 대한 설명이라니. 아무리 조용히 앉아 가만히 들어주는 것을 잘하는 저도 이쯤 되면 서서히 화가 날 만 했다.


 마유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서 눈만 꿈뻑이고 있는 미코시바에게 좀 더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고개를 조금 옆으로 돌려 입술을 마주대려 했다. 숨결마저 떨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마유의 마가슴도 숨결과 함께 불규칙하게 떨려왔다. 하지만 입술이 거의 닿기 직전의 순간, 마유는 미코시바의 손에 밀쳐졌다.  마유를 밀쳐낸 미코시바도 순간 놀랐는지 재빨리 사과하려고 입을 달싹였으나, 마유가 한발 빨랐기에 그 말은 허공에 흩어져 버렸다.


"형은 내가 싫어요?"


 아, 굉장히 무서운 얼굴이다. 미코시바는 마유가 화내는 것은 제게 처음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 잠시 숨을 멈췄다. 자신은 마유를 이렇게 화나게 할 속셈은 없었는데, 그저 조금 준비가 안되어 있었을 뿐인데, 아무래도 마유를 화나게 해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자식.. 그렇게 나가서 연락이 없어서.."

"그래서 미코링 나한테 사랑 상담하는거야?"

"치요오..."

"커플들 다 죽었으면..."


 얘가 대학가더니 대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 거야.. 미코시바는 귀여운 얼굴로 커플들은 다 죽어도 싸다는 말을 해대는 제 고등학교 동창에게 순간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한켠으로는 천하제일의 눈새라고 불리는 노자키에게 반해 오년째 짝사랑만 이어오고 있는 제 고등학교 동창이 좀 불쌍해지기도 했다. 다행히 노자키와는 같은 대학에 들어가서 이리저리 같이다니고 있긴 한데, 역시 아직까지 그냥 친구관계일 뿐이다.


 사실은 노자키는 너를 정말 이성으로 안보는 모양인데 포기하는게 좋지 않을까? 하고 조언해주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치요가 마시고 있는 저 에이드의 유리잔으로 머리를 강타당할 것 같아서 그것만은 참았다. 


"그래도 일년이 됐는데 뽀뽀 한 번 이라니.. 커플마다 속도는 다를 수 있지만 그건 너무 심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마유도 이제는 성인이고."

"하,지만 나 왠지 그녀석 얼굴만 봐도 좀, 좀, 그, 그거 있잖아, 치요 너도 잘 알 거 아니야. 뭔가 , 으 ,마, 만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게 막상 또, 부끄, 으아아아"

"더 이상 염장지르면 미코링이고 뭐고.."


 진심으로 사람 하나 죽일 듯 살벌해진 눈빛으로 치요가 에이드 잔을 집어들었다. 그 장면에 식겁해서 얼른 치요의 손을 끌어당겨 에이드잔을 겨우 뺏은 미코시바가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아, 그, 미안 치요. 그게 아니라 조금 , 흐, 어. 하여튼 그래서 나도 그, 그렇게 진도 나가는 건 생각해본 문제고 언젠간 해야한다고 당연히 생각하지만, 그래도 막상 그 타이밍이 되면 두려워진달까.."


 미코시바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애꿎은 냅킨을 주물럭거렸다. 자신도 남잔데 스킨쉽이 마냥 싫기만 하겠는가.. 다만, 다만 그 사랑받는다는 간질거리는 느낌을 참을 수가 없어서 언제나 마유가 한발짝 다가오면 두발짝 뒤로 물러서고 만다. 속으로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몸이 먼저 반응해버리는데 어쩌란 말인가... 아마. 마유는 많이 실망했을 것이다. 아무 이유없이 스킨쉽을 거절하는 애인이 있다면, 아마 내가 마유의 입장이었다면 실망하고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 연장자답게 리드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리드받고 있는 입장인데 이렇게 빼기만 하면... 


"아, 미코링. 말하는 도중에 미안한데 노자키군한테 호출와서, 나 먼저 나가봐도 될까?"


 오늘 에이드 사줘서 고마워. 치요는 손인사를 하며 재빨리 카페를 빠져나갔다. 야! 너는 사람이 말을 하고 있는데!! 미코시바는 에이드 잔과 함께 덩그러니 남겨진 제 신세를 한탄하며, 역시 세상에 믿을만한 친구는 하나 없다는 걸 오늘도 뼈져리게 깨달았다. 역시 우정보다 사랑인거냐.. 나도 번듯하고 멋진 애인이 있다고, 이자식들아. 그렇게 생각하니 마유가 또 보고 싶어져서 미코시바는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만 내렸다 올렸다 반복하며 마유에게 전화를 걸까 말까 거의 십분은 고민했다. 아무래도, 화나게 했으니 먼저, 걸어야겠지..? 미코시바는 훕- 숨을 들이쉬고 발신버튼에 손을 가져다 대려 했지만 아주 근소한 차로 미코링의 휴대폰이 먼저 울렸다. 


 "마유?"


 발신자는 노자키 마유여서 미코시바는 헉, 어쩌지 어쩌지, 를 연발하다 겨우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고 핸드폰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어쩐지, 조금 예감이 좋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