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테디베어물을 소재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 날 밤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결혼날짜는 너무나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그녀의 웨딩드레스를 고르러 샵에 같이가고 , 샵에서 나온 후엔 그녀와 내 손가락에 딱 맞는 반지를 사고, 그녀의 인가친척에게 돌릴 선물들을 고르는,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휙휙 보내다보니 어느 덧 결혼식 날은 하루 뒤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어차피 남들처럼 분가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 될 사람이 이 집에 들어와 살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 집이 벌써부터 그립다거나하는 감상에 젖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제는 진정으로 가정을 꾸리고 그 가정의 가장이 되어 제 한사람 몫만이 아니라 여러가지 역할 수행을 동시에 해야하는 '가장'이 되어야 한다는 초조함과 불안감에 가슴이 짖눌러 결혼이라는 것이 두렵게 다가왔다. 그녀도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그래봤자 어차피 내일 나는 결혼식 장에 입장할 것이고, 이제와서 도망칠 거라는 용기있는 결단도 못 내릴 겁쟁이지만 말이다.

 피부를 위해서 일찍 자두라고 어머니가 그랬는데. 오늘따라 왜이리 잡념이 많은거냐. 나는 벽에 걸린 시계가 벌써 자정을 가리키는 것을 보며 어머니의 충고대로 얼른 잠에 들자고 마음 먹었으나 인간은 항상 긴장하면 잠이 안오기 마련인 동물이다. 나는 처음 수학여행 가는 어린애라도 된 것 마냥 결국 잠들지 못하고 어두운 방 안에서 눈만 멀뚱멀뚱히 뜬 상태로 다시 여러가지 생각에 잠겼다. 

 먼저 결혼한 형이 이르기를, 연애랑 결혼은 많이 다르다던데 그녀도 결혼하고 나면 사람이 달라져버리는 걸까? 그건 그것 나름대로 재밌을 수도 있겠지만 굉장히 참한 여성이니 바가지 긁는 모습은 전혀 상상히 안갔다. 아이는 둘이나 셋 쯤이 좋을까. 딸 하나 아들 하나면 적당할 것 같단 말이지. 내일 친구들은 몇명이나 올려나. 대학 친구들은 온다고들 하던데, 중학교 동창들은 와줄까? 아무래도 집끼리 아는 손님들이 많이 오겠지.  

 에이치는... 오려나? 나는 급기야 생각난 소꿉친구의 이름에 조금 가슴이 먹먹해졌다. 녀석은 올 생각일까. 그 날 이후 다시 연락 한 통 없네.

 역시 녀석이 아무리 내게 심한 소리를 했다고 해도 역시 친구는 친구인 모양이었다. 이런 때 녀석이 몹시 생각나는 거 보면. 얼굴이 생각나니 녀석의 다정한 목소리가 조금 듣고 싶어졌다. 녀석이 나를 사랑의 감정으로서 좋아하든 말든 지금은 그저 내 일생의 대부분을 같이 지냈던 소중한 '친구'인 텐쇼인 에이치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녀석이 괜찮다고 해주면, 나는 당장에라도 미래에 관한 두려움은 싸그리 잊어버리고 편안한 기분으로 잠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다 깬 잠은 저 한 구석으로 밀어버리고, 나는 침대에 걸터 앉아서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남들이 보면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 할 수 없을 법하게 '텐쇼인 에이치'라고 정직하게 저장된 이름을 보니 조금 두근거렸다. 늦은 시간인데 전화 걸어도 될까-, 처음에 말은 뭐라고 꺼내지, 녀석이 일부러 안받는 건 아닐까? 라고 혼자 여러가지 것들을 생각하고 있던 때, 운명같이도 상대방에게서 전화가 먼저 걸려왔다. 너무나 기가막히는 타이밍이라 나는 잠시 방 안에 몰래카메라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망상에 사로잡혀 주변을 휘휘 돌아보다가 이내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야. 케이토"

"어, 에이치"

 이게 뭐라고 괜히 목소리가 떨렸다. 설상가상으로는 손에 땀까지 차서 핸드폰 놓칠 뻔 했다.

"내일 결혼 축하한다고 전화하려고 했는데, 늦게까지 안자고 있었나보네"

 녀석의 음색은 한없이 다정하고 포근했다. 나는 어릴 적 부터 녀석의 목소리를 퍽 좋아했다. 외모에 가려져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사실 에이치는 목소리가 일품이었다. 딱히 녀석이 별 말을 건낸 것은 아닌데 괜히 눈시울이 붉어지려 했다. 그 날 밤, 내 귀가 어떻게 되어버린 게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에이치는 내가 아는 그 다정한 음색의 에이치로 돌아와 있었다. 

"너야말로 이 늦은 시간까지 안자고 뭐하냐. 뭐. 축하는 감사히 받도록 하지.'

"얼른 자둬. 그래야 내일 이쁘게 하고 만나지."

"곧 신랑될 사람한테 이쁘게 하라는 게 뭐냐."


"흐음 글쎄. 뭐, 신부는 결혼식 날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어야 하니까 말이야."

 녀석이 지금 내게 농을 건낸 건가? 하고 녀석의 말에서 과연 유머코드가 어디에 담겨 있었는지 해석해보려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녀석은 이내 내일 결혼할 사람을 너무 오래 붙잡아 두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하다며 전화를 끊으려 했다. 

"내일보자 케이토"

 전화를 끊고 나는 정중히 테이블 위에 방금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가지런히 올려두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어느덧 불안과 초조함은 눈 녹듯 사라져 있어, 나는 이게 친구 좋다는 건가- 싶었다. 자, 어서 자자. 그리고 내일은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한 결혼식을 올리자.





 다음날, 나는 눈이 부셔서 감았던 눈을 떴다. 굉장히 햇빛이 잘 들어오는 방이었다. 아마 침대를 기준으로 오른 쪽으로 나있는 발코니 덕인 듯 싶었다.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발코니가 방의 채광을 담당하고 있는 값비싼 호텔 스위트룸 같은 이 곳은 내 방은 아니었다. 이게 대체 무슨...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나는 기우뚱 균형을 잃고 넘어져 버렸다. 다행히 침대가 무척 푹신했기 때문에 어디가 다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의아했다. 왜 일어나는 것이 잘 되지 않을까? 나는 궁금해서 내 몸을 살피다 발견하고야 말았다. 없어진 내 팔과 다리를. 너무 비현실적이라 순간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직 꿈 속인가? 아니 이건 필히 꿈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룻밤만에 삼십년을 달고 살아온 멀쩡한 팔다리가 신체분리 마술이라도 부린 것 마냥 없어질 리가 없으니까. 나는 너무나 깔끔히 잘려있는 팔 다리의 절단면을 바라보다가 팔다리가 없어지는 꿈은 흉몽일까 길몽일까, 하는 엉뚱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곧 너무 꿈 속에 안주하고 있으면 결혼식에 늦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이 꿈에서 깨려고 노력했다. 꿈 속에서 이게 꿈이란 것을 의식하면 으레 깨어나지기 마련인데, 아무리 의식해도 이 꿈은 깨어지지가 쉽지 않았다. 나는 조금씩 불안해졌다. 무언가 무서운 생각이 밀려들어왔다. 아냐 아니다. 그럴 리가 없어. 나는 애써 밀려 들어오는 생각을 무시하고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 입술을 한껏 물어 뜯었다.

"케이토 일어났어?"

  알고 있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이 꿈에서 일어나려고 노력해도 전혀 효과가 없어 마침 울고 싶어 진 그 때, 문이 열리면서 낯익은 목소리가 내 귀에 날아와 꽂혔다.

 에이치가 꿈에 나오다니. 드문 일이었다. 나는 꿈 자체를 잘 꾸지 않을 뿐더러, 에이치가 나오는 꿈은 살면서 몇 번 꿔 본적이 없었다. 이렇게 생생한 형태의 꿈이라니. 어떤 악마가 이런 꿈을 내게 보여주는 지는 몰라도, 이 꿈은 너무 생생하고 정교해서 정말 까닥하다가는 진짜라고 믿어버릴 것 만 같았다. 홍차잔을 들고, 흰 양복을 입은 에이치가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더니침대 머리에 앉아 내 머리를 다정히 쓸어주었다. 이렇게 생생한 촉감과 온도라니, 정말 실력좋은 악마가 프로그래밍한 꿈 인가보군. 

"생각보다 안아프지? 실력 좋은 사람한테 부탁해했거든."

 녀석이 내 이마에 제 입술을 맞췄다. 부드럽고 말캉한 그 입술 촉감에 나는 한순간 생각 저 뒤 편으로 밀어두려고 노력했던 그 공포를 무방비하게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피부가 조금 거치네. 케이토. 그러게 일찍 자랬잖아. 신부는 결혼식 날 가장 아름다워야 하는 존재니까 말이야."

 구토가 일었다. 감당할 수 없는 이 현실에, 차라리 이 자리에서 즉시 기절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하늘은 이미 내 편이 아니었기에 그것마저 쉽게 이뤄주지 않았다.

"어서 가자. 우리 결혼식에 늦겠다."

 그런 다정한 음색으로 내 입에 재갈을 물리는 이 녀석은, 이미 인간으로서의 이성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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