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냉장고에는 고기뿐인가ㅡ. 어쩐지 역해졌다. 아무리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같은 고기를 계속 먹다보면 질리기 마련인데 하물며 나는 고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야채나 샐러드같은 건 없나, 하고 냉장고의 칸을 모두 뒤져봐도 전부 고기일 뿐이다. 이즈미씨는 대체 고기도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서 이렇게 고기를 잔뜩 사온건지. 냉장고의 문을 닫으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밖에 나가서 야채라도 사와야 하는 모양이었다. 귀찮은데..
대체, 왜 이렇게 고기만 잔뜩 사온거야- 하고 나는 이즈미씨를 조금 책망했다. 그치만 역시, 내가 와서 고기가 이렇게 잔뜩 있게 된 거구나. 내가 온 기념이라며 기뻐서 고기를 잔뜩 들여놓던 세나 이즈미 선배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다 나를 위한 마음이다 생각하니 조금은 심장이 간질거렸다.큼-, 하지만 역시 야채는 사와야겠지. 나는 간단히 쇼파에 걸린 후드를 집어 입고, 마스크를 꼈다. 아무래도 오늘은 황사가 심한 모양이니까.
현관에 있는 신발을 아무렇게나 구겨신고 밖에 나갔다. 바깥세상은 먹구름 가득 낀 회색이었다. 손으로 살짝 눌러보면 금방이라도 비가 짜내질 거 같은 거대한 회색 스펀지다. 그래도 아직 비는 떨어지지 않는데, 우산을 가지고 가는 게 좋을까, 걸어서 오분거리니까 가지고 가지 말까- 하고 잠시 눈대중으로 재어보았다. 하지만 역시 감기에 걸리면 나뿐만 아니라 이즈미씨한테도 영향이 가니까 되도록이면 가져가는 쪽이 낫겠지. 나는 다시 문을 열어 현관에 세워진 우산꽂이에서 가장 저렴해 보이는 비닐우산 하나를 손에 들었다. 사실 이렇게 간단한 일인데, 사람은 그 간단한 것을 하기 위해서 귀찮게 여러번 고민한다. 역시 가장 좋은 것은, 애둘러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해버리는 것인데. 나는 작게 웃으며 다시 밖으로 나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아, 그러고보니까 지금 신고 있는 신발 이즈미선배꺼구나. 구겨신으면 또 한소리 듣겠는데. 엘리베이터가 4층까지 오길 기다리는 사이 잠시동안 신발을 고쳐 신었다. 현관에 있길래 대충 신은 이즈미 선배의 신발은 자로 잰 듯 딱 맞았다. 아무래도 덩치가 비슷하니까 신발도 대충 맞는거 겠지? 4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이내 문을 열었다. 당연하겠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것이 조금 서글퍼졌다. 그러니까 지금 마코토, 나 자신 안에는, 내가 있었다.
*
내 이름은 유우키 마코토이다. 학창시절에는 아이돌을 했고 꽤 오래 전에 은퇴를 했다. 그다지 대단한 아이돌은 아니고 지방아이돌 정도였어서 지금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등학교 시절에 잠깐 아이돌 활동을 하다가 수험생때 은퇴를 하여 대학은 지역에서 그럭저럭 평판있는 사립대학에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고, 대학 문제로 일학년때부터 자취를 해왔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동거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세나 이즈미는, 유우키 마코토와 동거를 하고 있었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겠지만 지금 내가 말한 세나이즈미는 일본에서 꽤 주가 높은 그 '모델'이 맞다. 어떻게 그와 인연이 닿았냐고 묻는다면 지방 아이돌이지만 운좋게 공중파 tv 토크쇼에 출현하게 되어 방송국을 견학가게 된 날 우연히 만났다고 할까. 하지만 이즈미씨는 그 전 부터 날 알고 있었고 그 전 부터 내 '팬' 이라고 인사를 건네왔다. 유명인이 자신같은 지방아이돌을 알고 있다는 것이 놀랍고도 기뻐서 나는 그 날 바로 이즈미씨와 폰번호를 교환했다. 이즈미씨는 아주 친절한 사람이라, 일반인에 가까운 무명아이돌인 나를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정말 꼼꼼하고 세심히 챙겨주었다. 정말, 세심히.
「뭐해, 유우군?」「오늘 촬영 있어, 유우군?」「어제는 전화가 꺼져있었네. 어디 아프기라도 했던 거야 유우군?」「유우군. 지금 난 니가 보이는데 왜 전화는 안받아?」「유우군?」
이렇게나 잘해줬는데.
*
오랜만에 거울과 마주했다. 나 이렇게 생겼었나? 하고 조금 생소해진 기분이 들어서 얼굴을 매만졌다. 거울에 비친 내 표정은 너무 무뚝뚝한 것 같아서, 얼굴근육을 끌어당겨 입가에 미소를 지어보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역시, 그때 그 얼굴은 아니다. 내가 참 좋아하던 얼굴은, 지금은 너무나 변해 있었다.
*
신문에는 오랜만에 보는 진짜 내 얼굴이 실려있었다. 사진은 '대학생 y군, 실종 60일째. 수사에는 진전이 없어.' 라는 제목의 기사에 삽입된 것으로, 지방아이돌활동을 하던 시절의 사진이었다. 역시 예쁜 얼굴이네- 라고 생각하며 읽고있던 신문을 쇼파에 내던졌다. 그리곤 나는 냉장고쪽으로 다가섰다. 오랜만에 진짜 내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사족)
쓰다말다 쓰다말다 고민을 거듭하면서 썼던 글입니다.
너무 정신없는 글이지만, 대충 세나 이즈미가 마코토를 죽이고 자신이 마코토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내용입니다. 냉장고에 있는 건 역시 마코토의 시체라는 뻔한 설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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