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미 도련님, 밖에 좀 나갔다 오세요. 분명 또래 친구들을 잔뜩 사귈 수 있을 거라니깐요?"


 유모는 걱정이 많았다. 이즈미와 관련된 일이라면 어느 것이건 걱정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이즈미의 교우관계에 대해 큰 걱정을 해왔다. 이즈미는 유모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실 이즈미에게는 흔히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또래아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교우관계를 쌓지 못한 것은 이즈미 주변엔 가문끼리 잘 알고 지내는 어른들만 넘쳐나는 것이 주된 이유였고 어린아이치곤 조금 포악한 그의 성격도 한 몫했다. 사실 몇번 비슷한 신분의 가문끼리 만남이 있을 때 이즈미와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들이 먼저 다가온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 아이들은 모두 울면서 이즈미의 곁에서 나가 떨어졌다. 그러니 유모가 이런 걱정을 해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였다. 친구는 나이가 들 수록 만들기 어려운 법이었다.


 이즈미는 어제 내린 눈으로 밖이 추워져서 나가기 싫었으나 유모가 결국 외투까지 입혀주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등쌀에 밀려 집을 나설 수 밖에 없었다. 별로 내키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마을을 느리게 걸었다. 겨울이라 짚으로 덮어놓은 밭들은 생명력이라는게 좀 체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시골바닥에서 마을 사람들은 대체 뭘 하고 사는걸까? 라는 안쓰러운 마음이 생겼다. 이 마을의 사람들은 아마 이 마을에서 적당한 사람을 찾아 적당히 이곳에 가정을 꾸리고 이 동네를 세계의 전부로 인식한채 큰 도시한번 나가보지 못한 채로 이대로 적당히 죽어버리고 말겠지.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야.


 이즈미는 입을 비틀어 웃었다. 자신은 이곳의 사람들과는 달랐다. 자신은 왕 다음으로 지위가 높은 귀족 가문의 외동아들이었으며 필히 제 가문을 물려받아 이 안쓰러운 사람들을 지배하는 나라 제일의 관리가 예정이었다. 이 천박한 곳에 머무는 것은 잠시 뿐, 어머니의 허리가 거의 회복되었기에 다음주가 되면 이 구질구질한 동네를 떠날 예정이었다. 그러니까 유모가 바라는 친구같은 걸 그다지 만들 이유가 없었다. 


 앞으로 한바퀴만 더 동네를 돌다가 집에 들어가자- 라고 생각하던 때 우물가에 도착했다. 동네 쳐녀들이 삼삼오오 모여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빨래를 하고 있었다. 겨울이라 살얼음까지 낀 물에 빨래를 하는 것은 꽤나 괴로운 일일텐데 어찌된 일인지 처녀들의 얼굴엔 웃음만이 가득 펴있었다. 아이를 등에 들쳐매고 수다를 떠는 아줌마들도 몇몇 눈에 띄었다. 여자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저들끼리 깔깔대더니 이내 곧 근처에 서있던 이즈미를 발견했다.


 이 시골에서는 흔히 보기 힘든 곱상한 외모의 이즈미를 보며 처녀들은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대충 말을 엿들어보니 '세나가문의 도련님'이라던가 '저 큰 대궐의 도련님'이라던가 자신의 이름을 대신해 부르는 명칭들이 들렸다. 아마 자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시골바닥에서 꽤 유명인사가 되어있는 모양이었다. 시끄러워, 라고 여자들에게 쏘아주고 싶었으나 굳이 나서서 이동네 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기특한 생각도 없었지만.


 "마코토, 저 도련님 너랑 나이또래가 비슷하겠다. 말이라도 걸어봐."

 

 한 처녀가 곁에 있던 아이에게 말거는 소리가 들렸다. 마코토, 라고 이름불려진 소년은 아마 자신보다 한두살 어린 티가 나는 같은 소년이었다. 저 무리의 유일한 남성이기도 했다. 소년은 빨개진 손을 호호 불며 적의없는 맑은 눈으로 이즈미를 바라보았다. 이즈미는 저 맑은 시선에 빠져들어 잠시 생각을 멈춘 채 소년의 눈동자만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씨-익 입을 찣으며 웃는, 아직 풋내나는 소년의 미소에 제가 넋을 놓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곤 얼굴을 붉혔다. 어째서 난 남자 따위한테 아름답다고 생각해버린걸까! 부끄러웠다. 치욕에 가까운 부끄러움이었다.


 이즈미는 등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제가 왔던 길을 더듬어 본가로 향했다. 쿵쿵, 심장이 발걸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뛰었다. 이즈미는 심장의 속도를 따라잡으려고 땅을 박차며 전속력으로 달렸다. 정말이지 귀족의 몸가짐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있는 아버지가 보았다면 품위없다고 한소리 들었을 법한 장면이었다.











"어머. 도련님 나가시게요?"

 

 외투를 제 스스로 챙겨입는 이즈미를 보고 유모는 의외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침 이즈미에게 간식을 가져다 주려 했던 것인지 유모의 두 손엔 양과자와 찻잔이 담긴 작은 소반이 들려있었다. 이즈미는 이 동네에 와서 산 지 반년동안 한번도 제 스스로의 의지로 이 집 밖을 나간 적이 없었다. 어제는 저 어린 도련님을 겨우겨우 등쌀을 밀어서 나가게 한 것이었는데 하루만에 저렇게 스스로 외출준비까지 하고 나가려 하다니. 사람이 하루만에 변하면 큰 일이라던데 …하고 유모는 조금 걱정했다. 이상적으로 바라던 장면이었지만 어쩐지 막상 현실로 닥치니 감동보다는 걱정이 밀려왔다.


" …그 과자 좀, 싸 줄 수 있어?"


 이즈미가 유모의 시선을 조금 피한 채 물었다. 저 어린 도련님은 어릴때부터 부끄럽다고 생각할때마다 시선을 피하는 버릇이 있었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그의 곁에서 그를 가장 많이 겪어온 유모만은 알고 있는 버릇이었다. 왜 과자를...? 설마 도련님께 친구가 생기신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유모는 좀 전까지 하던 걱정이 떨쳐지고 이내 감격으로 마음이 울컥해지는 것을 느꼈다. 도련님께 친구라니! 이건 세나 가문에 길이 남아야 할 소중한 역사적 순간이 아닌가! 하고 조금 호들갑스러운 마음으로 유모는 소반을 들고 주방으로 달려갔다. 이즈미에게 싸줄 과자를 고운 색의 보자기에 담기 위해서. 



 "어? 어제 그 도련님이죠?"


 우물가에는 어제와 같이 소년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다만 어제 삼삼오오 모여 빨래를 하던 시끄러운 처녀 무리들은 보이지 않았다. 저 쪽 고목나무 아래서 몇몇 동네 아이들이 공기놀이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소년은 이즈미를 한 눈에 기억해 냈다. 사실 기억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저렇게 좋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값 비싼 옷을 입을 수 있는 것은 아마 이 마을에서 세나 이즈미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마코토의 옷은 다 헤져서 여러번 천을 덧 댄 낡은 유카타였다. 이즈미는 소년의 말에 별 대꾸를 하지 않고 조용히 소년의 빨래하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처음에는 이즈미쪽을 힐끗거렸던 소년도 이즈미가 별 말이 없자 원래하던 빨래에 집중했다. 찰박찰박, 물소리가 듣기 좋았다.


 이내 소년은 빨래를 끝마친 것인지 몇 번 방망이질을 툭툭해대더니 빨랫감이 담긴 대야를 들고 구부렸던 다리를 펴서 일어섰다. 다리가 조금 저린 것인지 으으-하는 작은 신음을 냈다. 그러곤 아직까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이즈미를 보고 무슨 볼일이?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살폈다. 이즈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소년은 조금 이상한 생명체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이즈미를 한번 훑곤 그를 지나쳐 제 갈길을 가려했다. 하지만 곧 소년의 발걸음은 타인의 힘에 의해 멈춰졌다. 제 어깨를 잡아온 세나 이즈미를 보며 소년은 다시 그 맑은 시선으로 충분히 이즈미를 기다려 주었다. 이즈미가 입을 떼었다. 귀기울이지 않으면 공중으로 분해 될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소년은 참을성있게 이즈미의 목소리에 온 정신을 집중해주었다.


 "저기 …, 과자 먹을래?"


 이즈미가 품 안에 넣어두었던 과자가 담긴 보자기를 내밀었다. 소년의 시선을 약간 피한 채 였다. 귓볼은 감나무에 갓 열린 단감마냥 붉은 기세로 달아올라 있었다. 보자기를 내밀고 있는 오른손은 긴장으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소년은 이즈미의 제안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소년은 자신이 종종 나무를 하러 오른다는 동네의 나즈막한 동산에 이즈미를 데려갔다. 그곳에선 이 마을을 한 눈에 다 담을 수 있었다. 세나가문의 별장도 이 동산에선 막힘없이 다 보였다. 새끼손톱만한 초가집들 사이에 그 집들의 열배는 훌쩍 넘어보이는 자신의 집이 새삼스레 크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꽃이 필때 왔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 아쉽네요."


 소년은 진심으로 아쉬운 듯 했다. 철쭉과 진달래 등이 피는 봄에 이 언덕에서 동네를 바라보고 있으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고 소년이 사족을 덧붙였다. 정말 그럴 것 같았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나이는 아직 아니였지만 소년이 말하니 왠지 정말 그럴 것 같았다. 둘은 눈이 쌓이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이즈미가 가져온 보자기를 풀었다. 형형색색 고운 색깔을 띄고 있는 양과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아무래도 유모가 과자를 더 넣은 것 같았다. 혼자먹기에는 아무래도 많은 양이었다. 초콜릿의 달콤한 향기가 후각을 간지럽혔다. 소년은 초콜릿을 가리키며 이것이 무엇이냐고 이즈미에게 물었다. 약간 소똥같은 색깔이라며 작게 꺄르르 되었다. 이즈미는 소년에게 친절하게 초콜릿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서양에서 즐겨먹는 간식이래. 원래는 카카오라는 열매인데 그걸로 이 초콜릿을 만든다나봐. 나도 카카오라는 열매는 본 적이 없지만 이 초콜릿은 종종 즐겨먹어. " 


 그리곤 별모양이 찍혀있는 초콜릿 하나를 조심히 들어 소년에 입에 신중히 넣어주었다. 소년은 먹는 방법을 모르겠다는 듯 초콜릿을 입에 넣고 한동안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이즈미만을 바라보았다. 이즈미는 소년의 행동에 어깨를 으쓱이곤 제가 먼저 시범을 보이겠다며 제 입에 초콜릿을 하나 넣고 우물우물 빠는 행동을 해보였다. 소년도 이내 그것을 똑같이 따라했다. 그러더니 잠시 혼이나간 듯 혼미한 표정을 지어보이곤 이내 눈물을 글썽였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이예요.."


 생각 외의 반응이 이즈미를 즐겁게 했다. 이즈미는 기분이 좋아져서 남은 과자는 다 너 먹으라고 웃어보인 뒤 보자기를 다시 묶어서 소년의 빨랫대야에 넣어주었다. 소년은 진심으로 감동한 표정으로 몇번이고 이즈미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가진 것은 없지만 제 선물이라며 엉성하게 깍여진 나무인형도 보답으로 건냈다. 사실 이즈미의 집에는 저 나무인형보다 훨씬 훌륭하고 재밌는 장난감이 발에 채일정도로 많이 있었지만 이즈미는 처음으로 남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이렇게 좋은 것은 본 적이 없다며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내일 또 만날 수 있을까?"


 언덕에서 내려와 각자의 집으로 흩어지기 전, 이즈미가 소년에게 물었다. 소년은 물론이라고 대답했다. 다음 날 점심때 쯤에 서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 내일은 더 맛있는 과자를 가져다 주겠노라고 이즈미는 선언했다. 소년은 와아-하고 환호했다. 둘은 이내 큰 길에서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이즈미의 입에서는 아무리 연습해도 잘 되지 않던 휘파람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유모! 정말 다 담았지? 그 쿠키도 담고, 초콜릿도 가득 담았지? "

"어휴, 도련님. 몇번이나 말씀하시는 거예요. 다- 챙겼다니까요. 너무 많이 드시면 살쪄요?"

"상관없어-. 그건 그렇고 젤리도 챙겼지?"


 주전부리를 싼 보따리는 어제보다 훨씬 그 부피가 커져있었다. 이즈미는 보따리를 건네받지마자 신발을 신은 채 그대로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늦게 피운 바람이 더 독하다더니 우리 도련님이 딱 그꼴이구나, 하며 유모는 허허 웃었다. 대체 어떤 친구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까다로운 세나 이즈미 도련님을 저렇게까지 구워삶다니. 정말 보통 사람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즈미는 이내 우물가에 도착했다. 어제 저녁에 눈이 와서 그런지 우물에 소복히 눈이 쌓여 있었다. 우물가에는 어린 여자애 하나가 빨래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는 이즈미와 눈이 마주치더니 이내 얼굴에 홍조를 띄웠다. 아무래도 추위때매 생긴 홍조는 아닌 듯 싶었다. 하지만 이즈미는 소녀에겐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저 어제 마코토가 앉아있던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오늘 더 커진 과자 보따리를 보면 마코토가 어떤 표정을 지어줄 지 즐거운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 흘렀다. 마코토가 조금 늦는 것 같았다. 자신이 너무 빨리 나와버린 것인가? 이즈미는 보따리를 끌어 안으며 조금이라도 추위를 이겨보기 위해 발을 동동 굴렀다.


 



 아낙네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부지런히 왔던 길을 따라 돌아갔다. 벌써 스물여섯번째 아낙네였다. 손을 호호 불어가며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던 단발머리 소녀도 진즉에 가버리고 없었다. 마을 여기저기서 밥짓는 냄새가 솔솔 풍겨와 점심때부터 계속 공복상태인 이즈미의 코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리고있던 그림을 잠시 멈추곤 하늘을 바라보았다. 색붉은 주황색의 노을이 이 포근한 마을을 어머니가 자식을 감싸듯 포근한 모양새로 덮어가고 있었다. 노을이 지고 그 자리를 별들이 촘촘히 매꾸기 시작했다. 수도(首都)에서는 좀 체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손이 찼다. 지문이 쩌억 갈라져 있었다. 이미 감각이 사라져서 별 느낌은 없었다. 아까의 소녀처럼 자신도 손에 입바람을 후후 불어봤다. 결국 소년은 오지 않았다. 과자 보따리는 이미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아 둔 채였다. 왜 너는 오지 않았을까? 너는 바쁜 일이 있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이렇게 널 기다리고 있는데? 넌 내가 널 미워하게 되어도 좋은 것일까? 묻고 싶은 것이 저 하늘의 별만큼이었다. 별이 참 무수했다. 밝게 떠있는 별이 참 미웠다.


"도련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자신의 유모가 제대로 된 외투도 입지 않은채 나와 자신을 찾고 있었다. 유모는 이즈미를 발견하더니 이내 눈물샘을 촉촉히 적셨다. 혹시 도적들에게 잡혀간 것이나 아닐지 안절부절 걱정하던 마음이 이즈미의 얼굴을 보자 안도감으로 변했다. 유모는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이즈미를 향해 뛰어와 어둠 속에 홀로 서있던 이즈미를 품에 꼬옥 안았다. 유모의 품은 따듯했다. 이즈미의 볼줄기를 타고 물줄기가 갸날프게 흘렀다. 몸이 따듯해지니까 흐르는 생리적인 눈물일거라도 이즈미는 생각했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 유모 ... 흐, 읍. 유...모... "


 별이 참 무수했다. 저 별만큼 나는 너를 미워하기로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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