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분이 네가 자라서 모시게 될 에이치 도련님이란다, 어서가서 인사드리렴 케이토."


 아직 제 몸 하나 감당하기 힘든 열 살 아이에게 부모는 네가 모셔야 할 사람이라며 정원에서 놀고 있는 작은 소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이는 그 손가락을 응시하다가 그 손가락 끝에 걸려있는 어느 소년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햇빛에 반사된 소년의 금빛 머리칼이 반짝-하고 빛났다. 꼬마는 아직 케이토 부자를 발견하지 못한 듯 한창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케이토는 아버지의 바지춤을 붙잡고 저낯선 꼬마에게 다가가기 싫다라는 나름의 반항을 몸으로 표현했으나 아버지는 냉혹하게 케이토의 등을 떠밀 뿐 이었다. 


 케이토는 조금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낯가림이 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왜인지 저 아이와 친해지는 것은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원래 하라면 더 하기 싫은 것이 인간의 심리 아니겠는가. 게다가 저 아이의 뒷모습에선 아직 열 살의 머리로는 정확히 정의하긴 힘든 어떤 불쾌한 기운이 스물스물 피어오르고 있었다. 학교에서 이유없이 친구를 따돌리는 것은 좋지 않다고 배워왔으나 저 아이에겐 어째서인지 다가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이것은 자신을 강자로 인식하고 자신보다 못한 약자를 짓밟고싶다는 잔인한 욕망이 아니였다. 오히려 자신을 약자의 위치에 두고 강자를 보면 있는 힘껏 줄행랑치고 싶어하는 약자의 논리에 가까웠다.


 케이토가 에이치에게 다가가는 것을 망설이자 케이토의 아버지는 엄한 표정으로 아들을 내려다 보았다. 그 얼굴에는 아들에 대한 실망감이 엿보였다. 저 아이와 친해지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아버지를 무척이나 실망시키는 일인 것 같았다. 케이토는 내키지도 않는 상대와 억지로 친구가 되는 것은 싫었으나 그때문에 제 아버지를 실망시켜 드리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케이토는 결심한 듯 제 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는 금발머리 소년에게로 다가섰다. 부슥, 잔디가 신발 깔창에 짖이겨 지는 소리가 들리자 소년은 고개를 돌렸다. 소년은 고개를 조금 위로 올려 케이토를 쳐다보았다. 아무런 적의가 없는 깔끔한 시선이었다.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큰 눈을 여러번 깜빡였다. 그리고 그 조막만한 얼굴에 단정하게 위치하고 있는 조그마한 입술을 오물거렸다.


 "넌 누구야?"

 

 소년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소년의 얼굴을 보자 아까의 적의심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마음 한켠으로는 이렇게 아름다운 아이와 친구가 될 수 있다니!하는 일종의 자부심이 가슴 한 켠에서 피어났다. 사람의 마음이란게 참으로 이렇게 갈대같은 것이다. 케이토는 얼굴을 부드럽게 풀었다. 그리고 가볍게 한 손을 내밀었다.


 "난 케이토야. 오늘은 아빠를 따라서 이 집에 왔어. 너는 텐쇼인 에이치지?" 


  소년이 귀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의 햇빛과 닮은 금빛머리칼이 고갯짓에 맞춰 살랑살랑 흔들렸다. 아버지가 그를 '도련님'이라고만 하지 않았다면 필히 여자아이로 착각했을 법한 예쁘장한 외모였다. 소년의 귓볼이 조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조금 낯을 타는 성격인 것 같았다. 저와 동갑이라고는 했지만 자신보다 한참은 어린 듯한 인상을 주었다. 


 "뭘 하고 있었어?"

 "나비와 놀고있었어."


 소년은 날개가 갈가리 찣긴 노란 나비를 케이토쪽으로 내밀었다. 나비의 몸통은 괴로운 듯 팔다리를 필사적이게 버둥거리고 있었다. 자세히보니 더듬이도 한 쪽이 부자연스럽게 꺽여져 있었다. 아마 태어날 때 부터 저런 나비는 아니었을 것이다. 누군가 저렇게 나비를 학대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학대의 주범은 아마도 천진난만한 얼굴로 나비를 내밀고 있는 이 소년이겠지. 케이토는 아까 느껴졌던 이질감이 다시 꿈틀 움직이려는 것에 놀랐다.


 아니다, 이 소년은 그저 순진한 것일 뿐이다. 그래, 잠자리의 날개를 떼며 노는 것은 사내아이라면 어렸을 적에 누구나 해봤던 사악하고도 순진한 장난 아니던가. 그런 것과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케이토는 나비에게 애써 시선을 주지않으려고 노력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어디선가 나비의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




 "우리 에이치가 케이토군을 참 잘 따르는 군요. 우리 애가 제대로 된 친구나 사귈 수 있을까 많이 염려하고 있었는데 케이토군 덕분에 여러모로 학교도 잘 다니고 있는 것 같아요."


 매달 한번씩 텐쇼인가와 하스미가가 어울리는 식사자리. 케이토와 에이치에 대한 이야기가 화두로 떠올랐다. 케이토는 입을 다물고 묵묵히 스테이크를 썰 뿐이었다. 자신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것은 어딘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되게 에이치는 제 아버지의 옆에서 화사하게 웃으며 케이토라는 주어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참 많이도 늘어 놓았다. 케이토가 어제 자신의 미술숙제를 도와줘서 선생님께 칭찬받았다느니, 최근에는 케이토덕에 성적이 올랐다느니 하는 둥의 시시콜콜한 이야기였다. 사실 에이치는 케이토보다 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으나 그런 식으로 종종 케이토를 띄워주곤 했다. 케이토도 사실은 그것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하하. 이녀석. 그렇게 케이토가 좋냐. "


 텐쇼인 기업의 회장직을 꿰차고 있는 남자가 쉬지않고 케이토에 대한 이야기를 조잘거리는 제 아들에게 물었다. 에이치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런 아들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두어번 쓸으며 회장은 생각에 잠겼다. 회장은 에이치에게 일종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미는 노산의 후유증으로 결국 에이치를 낳고 얼마 안 되어 하늘로 가버렸고, 홀로 남겨진 자신의 아들을 바쁘다는 이유로 유모의 손에 맡겨버린 것은, 어쩔수 없던 것이지만 그래도 아비로서 마음이 편치 못한 게 당연한 것이다. 제 아들은 언제나 해맑게 웃고 있었으나 가끔 그 웃음 뒤로 보이는 고독은 살대로 살아온 어른이 보기에도 감당하기 힘든 것이어서 종종 회장은 에이치가 나중에 커서 사회부적응자가 되는 건 아닐지 걱정에 휩싸이곤 했다. 케이토군을 만나고 난 후에는 그 눈빛에서 고독은 읽을 수 없게 되었으나, 대신 그 자리엔 야생의 무언가가 채워져 있었다. 


 종종 케이토를 바라보는 에이치의 눈빛에선 우정 그 이상의 분위기가 흘렀다. 회장이 그것을 느낀 것은 한 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회장은 애써 부정했다. 어미잃은 새끼가 너무 가여워서, 아비는 그 앞에서 눈이 멀었다. 아비는 그저 제 자식이 행복하기만을 바랄 뿐인 존재인 것이다.


 



*




 하지메가 놀러왔다. 하지메는 에이치의 먼 친척으로 어디 제약회사의 외동딸이라고 했다. 텐쇼인 회장은 에이치에게 하지메와 잘 놀아주라며 당부했지만 에이치는 초등학교 저학년 여자아이따위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듯 그저 방에서 밀린 방학숙제를 할 뿐이었다. 마침 케이토도 에이치의 집에서 같이 숙제를 하고 있었기에 그녀와 조우할 수 있었다. 한 손에 제 몸뚱이만한 곰인형을 끌며 나타난 그녀는 꽤나 낯을 가리는 성격인 듯 에이치의 방 한 구석에 앉아 그저 분홍색 곰인형을 가지고 놀 뿐이었다. 에이간단히 그녀를 무시한 채 케이토와 숙제 중이었다. 케이토는 그렇게 단순히 혼자놀고 있는 어린아이를 무시할 수만은 없어서 숙제를 하는 동안 틈틈이 그녀 쪽을 흘끔거렸다. 


 "케이토 이 부분 좀 알려줘."


  케이토가 곰인형의 리본을 다시 매주고 있는 하지메를 힐끔 바라보고 있자, 그 곁에 있던 에이치가 어딘지 심통이 난 목소리로 문제집의 마지막 문제를 툭툭 쳐댔다. 케이토는 너무 간단한 수준의 문제에 갑자기 기가 막혔다. 앞서 말했듯, 모든 교과 과목에서 에이치의 성적은 케이토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뛰어났다. 특히 수학에 있어서는 에이치는 중학생인 주제에 대학교 과정의 수학을 가뿐히 풀어버리고 만다. 그런데 겨우 이런 시시콜콜한 문제나 물어보다니. 갑자기 에이치의 머리가 멍청해 진 게 아니면 분명 어딘가 제 마음에 안들어서 심통을 내는 것이었다. 케이토는 에이치의 변덕까지 일일히 받아주는 좋은 친구는 아니었기에 간단히 에이치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기고 한숨을 쉬었다.


 "이정도는 니가 풀 수 있잖아. 니가 풀어."

 

 하지메가 이 쪽을 바라봤다. 둘의 투닥거림을 조금 부럽다는 눈으로 바라본 것 같았다. 내성적인 성격의 그녀에게 그다지 친구가 많을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아마 이쪽에서 말 걸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케이토는 잔뜩 입이 나온 에이치를 간단히 무시하고 구석에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하지메에게로 다가갔다. 


 "하지메아가씨. 저라도 같이 놀아드릴까요?"


 케이토는 하지메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공손히 앉았다. 제게 관심을 가져 준 것이 기쁜 듯 하지메는 어린아이다운 순수한 웃음으로 화답하더니 케이토에게 제가 들고 있던 곰 인형을 건내주었다. 아마 그것으로 같이 놀아달라는 뜻 같았다. 기본적으로 케이토는 아이들을 좋아했기 때문에 곰인형을 들고 평소엔 내지않는 가성으로 복화술까지 해보이며 하지메를 기쁘게 해주었다. 꺄르륵 거리며 박수를 치는 하지메를 보니 이렇게 귀여운 여동생이 있으면- 싶었다. 


 "..읏!"


 그때였다. 에이치쪽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케이토가 뒤를 돌아보니 에이치가 제 손가락을 쥐여잡고 아픈 듯 살짝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케이토는 하지메와 놀아주고 있던 곰인형을 방바닥에 급히 내려놓고 에이치에게 달려갔다. 문제집 한 귀퉁이에 피가 두어방울 떨어져 있었다. 아마 커터칼을 쓰려다가 베인 모양이었다. 


 "그러게 좀 조심하지! 기다려봐. 구급함을 가져올 테니까!"


 케이토는 허겁지겁 에이치의 방을 나갔다. 아마 이 집의 가정부에게 물어보면 구급함의 위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케이토가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 1층으로 내려가는 소리가 에이치의 방문 너머로 들렸다. 하지메도 깜짝 놀란 듯 에이치의 손가락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린아이에게 피라는 것은 극히도 두려운 존재다. 


 에이치는 칼에 베어서 아프다는 표현으로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곱게 폈다. 그리고 제쪽을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하지메를 향해 즐겁게 웃음 지었다. 케이토를 제 곁에 붙잡아 둘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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