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르륵- 한적한 시골동네에 드물게 거슬리는 소음이 포장도 안 된 길가를 울렸다. 그것은 곧게 다려진 흰셔츠차림의 스바루의 손에 끌려가는 캐리어에서 나는 소리였다. 스바루를 표지판도 제대로 없는 정류장에 떨군 버스는 카랑카랑 낡은 엔진소리를 내며 다음정류장으로 떠나버렸다. 으아 덥다, 스바루는 셔츠의 옷깃을 팔랑거리며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재빨리 하였다. 정자에서 수박을 쪼개먹고 있던 노인들이 이 시골에서 보기드문 새로운 젊은이의 등장에 수근거렸다. 스바루는 붙임성 좋게 그 쪽으로 다가가서 노인들에게 인사했다.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게 중에 스바루를기억하고 있던 노인이 있었는지 이내 손뼉을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스바루 아니여? 왜 있잖여, 고 마당넓은 집 외손주!"

 "아아, 야가 겨여?"


 이내 다른 노인들도 '흐메 많이컸네'라던가 '멋있어졌네-'라며 스바루를 반겨주었다. 스바루의 손에 가장 큼직한 수박 조각을 쥐여준 슈퍼 아주머니는 그중에서도 가장 호들갑을 떨며 스바루 본인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스바루의 과거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도 욕심이 많아서 제 주먹만한 사탕을 볼 양쪽에 두개씩 넣고 다녔다거나 하는 사소한 이야기들이었다. '에에, 제가 정말 그랬어요?' 하고 스바루는 넉살좋게 노인들과 말을 맞추다가 이내 시계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대로 있다간 저녁이 되도 집에 못 들어 갈 것 같았다. 노인들이란 말이 많은 법이니까. 스바루는 일어나서 다시 캐리어를 붙잡고 제 외할머니가 있는 신사로 향했다. 


 외할머니의 집은 마을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뜨거운 뙤약볕아래서 녹초가 된 스바루는 집에 들어오자 마자 마루에 그대로 뻗어 버렸다. 으아아- 여긴 에어컨도 없을 텐데.나 이대로 잘 지낼 수 있을까-따위의 약한 소리를 하던 스바루가 차가운 마루의 냉기에 조금 정신을 차리자 그제서야 일어서서 외할머니를 불렀지만 집 안에서는 아무런 대꾸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디 가셨나? 아니면 뒷뜰에라도 계신가? 뒷뜰에 있는 정원가꾸기가 취미인 외할머니였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스바루는 현관에 있던 슬리퍼를 주워신고 뒤뜰로 향했다. 여전히 뒷뜰가꾸기 취미는 유지하고 계시는 건데, 뒷뜰은 온갖 종류의 꽃들이 만개하게 피어있었다. 어렸을 적엔 저것들의 이름을 다 알았는데 지금은 멍청해졌는지 고작해야 해바라기 정도밖에 모르겠다. 


  "할머니 계세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여기도 아닌가? 혹시 창고에 계신가? 아니면 집 안 가장 끝쪽에 위치한 사당에 계신걸까? 스바루가 어디를 먼저 가 볼까 고민하는 사이 무언가 복슬거리는 게 다리 사이로 지나다녔다. 으앗, 뭐야! 하고 깜짝 놀란 스바루가 자세히 그 복슬거리는 털뭉치를 살펴보니 다름아니라 어릴적에 함께했던 개였다. 언제 이렇게 자랐대, 하긴 여기 마지막으로 온 지도 엄청 오래됐구나.  


 얘 이름이 뭐였더라 …, 하고 스바루는 살이 통통하게 오른 개를 들어올려 이리저리 살폈다. 다, 다이 뭐시기였던 거 같은데 …, 하고 스바루는 가물가물한 기억력을 더듬어 제 눈 앞의 이 생물의 이름을 찾아내려 애썼다. 분명 자신이 지은 이름인데도 어째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기 때 봤던 것과는 다르게 몸집이 훨씬 커져버려서 그런가? 하고 구차하게 이유를 덧붙여봐도 겉모습이 조금 변했다고 애완동물의 이름까지 잊을 정도면 그냥 치매일 것이다. 손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개의 보드라운 몸을 주물거리며 스바루는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다이지? 아냐 조금 이름이 길었던 것 같다. 다이키로? 이것도 아니다. 다이..다이..아, 그래 다이키치! 


 "다이키치!"

 "멍!"


 스바루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탄성과 함께 다이키치의 이름을 부르자 다이키치가 멍! 하고 그에 화답했다. 헥헥- 혀를 내밀고 꼬리를 흔드는 것을 보니 아마 이 이름이 맞는 것 같다. 스바루는 조금 멋쩍어져서 다이키치를 든 손을 쭉 뻗어 비행기를 태웠다. 낑낑- 하고 다이키치가 무서워하자 스바루는 히죽 웃으며 더욱 더 다이키치를 높이 쳐들었다. 껭껭, 다이키치가 약하게 짖었다. 그제서야 스바루는 다이키치를 푹신한 잔디에 내려주었다. 경계의 눈으로 스바루에게서 슬그머니 뒷걸음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미움받아버린 듯 했다. 이내 다이키치는 스바루에게서 등을 돌려 넓은 잔디밭 마당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멀리 사라져버렸다. 에에- . 스바루는 아쉬운 소리를 냈다. 저 아이가 제 손바닥보다 겨우 큰 강아지였을 때는 정성을 다해 보살펴 주었는데, 조금만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미움 받아 버리다니.


 스바루는 다이키치가 사라져버린 쪽을 바라보다 이내 따라가보기로 결심했다. 다이키치가 밟고 지나간 푸른 잔디들은 조금씩 꺽여져 있어서 찾기가 용이했다. 그러고보니 외할머니는 어디 계시는거지? 스바루는 마당에 나온 본 목적을 깨닫고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어디 마을이라도 외출하신걸까?


 스바루는 다이키치의 뒤를 좇다가 창고에 도착했다. 아, 창고다! 어렸을 적에 자주 숨어들어 놀곤 했던 낡디 낡은 창고였다.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할 때 이외에도, 외할머니에게 혼날 것 같은 때면 종종 이곳을 찾아 그 작은 몸을 숨기곤 했다. 여기는 진짜 하나도 안 변했구나 -, 하고 스바루는 키득거렸다.


 집 곳곳에 고집스러움이 남아있는게 제 외할머니와도 같았다. 거의 칠팔년만에 다시 찾는 집이었지만제 어릴적 기억 그대로 일치한다. 흐흐흥- 즐거운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창고의 문이 조금 벌어져 있는 것을 보아하니 아마 다이키치가 이곳으로 쏙 들어가 버린 것 같았다. 아마 잘하면 할머니도 여기 계실지 모른다. 스바루는 끼이익 바닥에 끌리는 녹슨 철제문을 손으로 더 벌려서 그 안으로 들어섰다. 


 멍! 하고 창고 안에서 다이키치의 목소리가 났다. 창고는 창문이 없어서 빛이 안들었기에 스바루는 그 어둠 속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스바루는 더듬거리며 앞으로 몇발자국 나아갔다. 멍! 다이키치가 또 짖었다. 햇빛이 안들어서 그런가, 여기는 엄청 서늘하네…라고 생각한 스바루가 제 앞에 서 있는 사람의 형상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에에, 할머니 여기 계셨어요? 제가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아 …"

 "뭐냐 네녀석은? "


 스바루는 비명 한 번 못지르고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 멍! 다이키치가 기절한 스바루의 주위를 맴돌며 시끄럽게 짖어댔다. 남자는 눈썹을 찌푸리며 기절한 스바루의 볼을 손끝으로 꾹꾹 눌러댔다. 

 "얘가 그 할멈의 손주야? 할멈이랑 다르게 되게 띨띨해보이네." 





(다음편...나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