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코토, 요새 바지통이 좀 좁아진 것 같다?"
마코토는 반찬그릇에 담긴 콩자반을 짚다말고 잠시 멈칫했다. 정작 말을 꺼낸 어머니는 아마 큰 의미는 없었던 듯 식사를 계속하고 있었지만, 마코토는 혹시라도 어머니가 눈치채버린건가- 싶어서 잠시동안 물을 마시는 척 하며 어머니의 표정을 살폈다. 어머 왜 그렇게 보니? 하고 마코토와 눈이 마주친 어머니가 가볍게 웃었다. 아아-.. 다행이다. 뭘 눈치채고 하신 말은 아니구나. 마코토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곤 마저 밥을 먹었다.
잘먹었습니다. 마코토는 다먹은 식기를 싱크대 위에 올려 놓곤 등교준비를 하기 위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 세워져있는 전신거울에 비춰진 자신을 보고있으려니 교복 바지의 통이 확실히 예전보다 좀 좁아보였다. 그래도 별로 안 줄인건데, 이렇게 티가 나는구나. 다른 아이들이 하라는 데로 바지를 줄였다면 아마 스타킹 정도가 됐겠는데.
아아, 학교 가기 싫다.. 마코토는 이번에는 입 밖으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어째서.... 자신은 신세에도 없는 일진짱이 되어버린 것일까. 마코토는 박복한 제 인생이 불쌍해서 찔끔 눈물을 흘렸다. 그래 자신은 언제나 운이 없었다. 얼마나 운이 없었냐면 태어날때에는 탯줄이 목을 감아서 자칫하면 지금 이렇게 살아있지 못할 뻔 했고, 평평한 길을 걷다가도 넘어지기 일쑤였으며 조금 더 운이 나쁘면 개똥을 밟기도 했고, 거기서 좀 더 운수가 안좋으면 무서운 개한테 쫓기기도 했다. 게다가 고짱등학교에 올라와서는 어쩌다보니 일진짱이 되어있었다. 아아, 신한테 미움받는 것도 정도여야지. 이정도면 그냥 난 전생에 사탄이었던건 아닌가.
겨우겨우 억지걸음으로 집을 나온 마코토는 역으로 향했다. 학교는 지하철을 타고 30분거리라, 그다지 가깝다고는 할 수 없었다. 사실 집 주변의 학교는 커트라인이 높은 명문고이기때문에 머리가 그다지 좋지못한 자신은 성적에 맞춰 알아보다보니 집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일반고에 지원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집과 학교사이의 거리가 조금 멀었기에 다행이도 동네에서 고교동창을 만날 일은 없었다. 그것은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학교에서 이런 일진그룹에 끼어들어있다는 것을 아시면 어머니는 뒷목을 잡고 쓰러지실 게 자명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이후로 아들하나만 바라보며 사시는 어머니인데, 자신이 학교에서 이러고 다니시는 걸 안다면, 아아, 어머니가 제게 실망하는 모습은 생각도 하기 싫다. 마코토는 고개를 도리질치며 굳이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지말자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이제 삼학년이고, 내년이면 졸업이니까. 그래, 이제 일년만 지금까지 해왔던 것 처럼 잘 숨기면 된다.
생각에 잠긴 마코토가 앞도 제대로 보지않고 걷자 이내 무언가 쿵- 하고 다가와 부딪쳤다. 넘어지진 않았지만 제 부주의로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쳤다는 생각에 마코토는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일단 고개부터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여 진심을 다해 사과하는 데도 상대로부터 별다른 반응이 없자 마코토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히익!"
그 곳에는 무지막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나 이즈미가 팔짱을 끼고 자신을 노려보며 서있었다. 히이익, 왜 부딪혀도 하고많은 사람들 중에 이사람이랑인거야! 마코토는 자신도 모르게 울상을 지으며 조금만 더 앞을 잘 보고 걸을걸-하고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세나 이즈미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자신을 한 대 칠 것만 같아서 마코토는 약간씩 뒷걸음질 했다. 세나 이즈미라하면 같은 동네에 살고있지만 가히 범접할 수 없는 엄친아로 왠만한 사람은 원서내기도 힘들다는 y 명문대학에 다니고 있고, 게다가 간간히 모델까지하는 그야말로 가질 것 다 가진놈이었다. 아, 한가지, 신이 그를 너무나도 완벽하게 만들어낸 나머지 인성에서 밸런스를 맞추려고 한 모양인지 세나 이즈미는 빈말이라도 성격이 좋다고 할 사람이 아니었다.
마코토는 이즈미와 친한 사이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같은 동네에 살면서 여러번 이즈미와 마주치면 그래도 같은 동네사람이라 미소를 띄우며 인사를 건내곤 하는데 이즈미는 한 번도 제 인사를 받아준 적이 없었다. 뭐 그건 딱히 자신만 미워해서 그런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사도 공평하게 씹고다니는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공부도 잘하고 잘생겼다고 동네 아주머니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좋았다. 공부만 잘하고 잘생기면 뭐하냐, 인성이 안되어 있는데, 인성이! 마코토는 연신 자신을 노려보고 서있는 세나 이즈미에게 쫄아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 깔면서도 손으로는 이즈미의 흉을 보았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
아니 애초에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냐. 사람이 말야, 어? 가끔 생각에 빠지면 앞 좀 못 볼수 있는 거고말야, 살다가보면 다른 사람이랑 부딪히는 일이 당연이 있기 마련이지, 뭐 너는 살면서 다른 사람이랑 한 번도 안 부딪혀봤냐고. 그리고 학교가야하는데 계속 그렇게 노려보고있으면 내가 학교를 못가잖아! 아 나 이래뵈도 일진짱이거든? 너같은 범생이는 나 따라다니는 애들 얼굴만 봐도 기겁하거든? 일진짱의 명령인데 얼른 내 앞에서 비켜라, 앙?
마코토의 협박-어차피 마음 속으로 한 거지만- 이 통했던 모양인지, 세나 이즈미는 아무 말 없이 마코토를 지나쳐 유유히 자리를 떴다. 그나저나 이렇게 자세히 이즈미의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인데, 그래도 역시 모델은 괜히 해먹는게 아니구나- 싶을 정도로 잘생긴 놈이었다. 저런 놈이 공부도 잘한다니. 세상은 불공평하다. 아마 예쁜 여자친구도 있겠지. 아아, 역시 세상은 불공평하다!
"형님! 오늘 끝나고 같이 가라오케 가시겠습니까?"
"아, 저기, 나도 이제 수험생이고.. 공부에 집중하고 싶은데.."
험악하게 생긴 까까머리 후배의 등장에 교실이 얼어붙었다. 아무리봐도 소 하나는 거뜬히 때려잡을 듯 한 인상을 가진 이 후배는 마코토를 '형님'이라고 칭하며 깍듯이 대해왔다. 벌써 이년동안 저를 따라다니는 후배들 중 하나였지만 마코토는 아무리해도 적응이 안 되었다. 이 교실의 모든 시선이 숨을 죽인 채 마코토와 이 목소리만 큰 까까머리 후배를 향했다.
"하지만 형님께 불러드리고 싶은 노래가 있어서, 저 연습해왔는데... "
야, 왜 갑자기 여린 척 하고 그래! 그리고 니가 내 남친이냐! 나때매 노래는 왜 연습해오는데!
마코토는 왠지 여기서 빼면 자신이 나쁜 놈이 될 것만 같아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엄마한테는 친구네 집에서 숙제하다 간다고 문자해야겠다. 사실 일학년때부터 주변에서 '불량서클에 소속되어있는 아이'로 낙인 찍혀 제대로 된 친구 하나 사겨보지 못한 마코토는 친구네 집, 이라는 단어를 문자로 치다 괜시리 눈시울이 울컥해졌다. 이게 다 입학식날 안경을 끼고 가지못한 제 책임이긴 했지만..
그러니까, 벌써 이년전. 고등학교 입학식 당일이었다. 중학 시절 친했던 친구들과는 혼자 다른 고등학교에 배정받고, 고등학교에 가서 새 친구를 사귀어야한다는 생각에 설레기도하고 두렵기도 해서 그 날 밤은 새벽 늦게야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정말 아슬아슬하게 입학식에 참가할 정도의 시간이었고, 마코토는 준비는 얼른 마치고 학교로 향하려했지만 도무지 안경이 어디갔는지 보이지를 않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자신이 비몽사몽 옷을 갈아입다가 모르고 장롱에 넣어둔 것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장롱에 안경이 있으리라고 생각도 못했던 마코토는 무척 좋지 않은 시력임에도 불구하고 첫 날의 지각만은 피하기 위해 결국 안경을 쓰지 않은 채로 등교했다.
하지만 남들이 행운의 여신의 사랑을 받을 때, 불운의 여신의 사랑을 한껏 받고 있는 마코토는 입학식날이라고 딱히 불운이 피해가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유독 그 날 더욱 불운의 여신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안경이 없어서 사람형체만 흐릿하게 보이는 와중에 양아치 무리 중 한 명의 발을 마코토가 실수로 밟아버렸고, 하필이면 입학식날부터 양아치와 시비가 붙은 마코토는 미안하다는 의미로 머리를 숙인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게 불량그룹 우두머리에게 박치기를 한 꼴이 되서 더더욱 양아치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양아치무리가 자신에게 손을 대려하자 마코토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팔과 다리가 막 나가는데로 휘두른 것 뿐이었으나 그 자리에서 양아치무리를 다 때려 눕혀버렸고, 그 이후로 마코토는 불량그룹에 반강제적으로 스카우트 되었다. 물론 마코토는 그들과 거리를 두고 최대한 접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들은 유대감이니 뭐니를 운운하면서 마코토를 매번 찾아왔고 덕분에 반친구들은 마코토에게 다가오지 않았고 정말이지 총체적 난국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삼학년이 된 지금은 자신이 불량서클의 우두머리 취급을 받고 있으니... 아, 역시 이번생은 포기..할까...
"형님 어땠습니까! 제 노래가! "
솔직히 돼지 멱따는 소리인줄 알았어, 라고 하기엔 마코토 자신은 그만한 깡이 없어서 속으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입으로는 잘 들었다고 칭찬해주었다. 그에 더욱 감동받은 까까머리 후배가 다음에는 더 좋은 곡으로 준비하겠다며 이상한 곳에서 열의를 태웠다. 삼분간 도무지 인간이 낼 수 없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던 마코토는 머리가 아파져 화장실에 가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자신의 열렬한 빠돌이임이 분명한 까까머리 후배는 그러면 저도 같이 가겠다며 마코토의 뒤를 따랐다.
같이 나란히 소변기에 서서 볼 일 보는 것이 부담스러워 마코토는 굳이 좌변기로 들어거 볼 일을 보고 있는데, 한순간 칸막이 너머로 까까머리 후배의 허밍-이라고 볼 수 없는 지옥의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한 순간 누군가와 시비가 붙어버렸다. 뭐, 뭐야. 급작스러운 전개에 마코토는 당황해서 얼른 볼 일을 보고 칸막이 밖으로 나왔다. 그 곳에는 까까머리 후배에게 멱살이 붙들려있는.....
"세나 이즈미...?"
세나 이즈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