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마코] 너는 변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죽었다. 그것은 벌써 삼 년이 된 일이었지만, 그 아이들은 아직도 내가 부르면 금방이라도 달려와줄 것만 같아서 나는 가끔 그 아이들의 이름을 소리내어 불러보곤 한다. 아케호시 스바루, 히다카 호쿠토, 이사라 마오. 이 셋은 모두 다음 스케쥴을 위해 장소를 이동하다가 변을 당했다. 그 날 감기때문에 스케쥴을 같이하지 못한 나는, 혼자 살아남았다. 


 별과 같은 존재가 되겠다던 아이들은, 정말로 밤 하늘의 별이 되어버렸다. 나는 나를 두고 별이 되어버린 친구들이 미워서 아직도 밤하늘을 올려다 보지 못한다. 사실은 밤하늘만 못 올려다보게 된 것 만이 아니다. 나는 그 이후로 너무나 많이 변해버렸다. 정말 여러가지 측면에서. 누구도 나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나는 기름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북북 긁으며 머리를 감은지 벌써 며칠째인지 속으로 어림잡아봤다. 어제는 확실히 아니었고, 엊그제도 기억이 없고, 아마 3일전 인 것 같다. 두피가 슬슬 가려워지는 것이 아마 3일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려운 머리를 감으러 화장실로 가는 대신 게임기가 연결된 TV앞 쪽에 앉는 쪽을 택했다.


 게임기 옆에는 먹다 남은 컵라면용기, 음료수병, 과자봉지등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나는 그것을 대충 발로 한 구석에 밀어버리고 발가락으로 게임기의 전원버튼을 눌렀다. 게임기가 로딩되는 것을 기다리다 조금 출출해져서 부엌에 가서 냉장고를 열었다. 인스턴트 식품과 배달음식이 냉장고에 너저분하게 쌓여 있었다. 그 중에서 엊그제 먹다 남은 피자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지이잉- 돌아가는 피자를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전자레인지의 문에 달린 유리를 통해 그곳에 비친 내 얼굴과 마주쳤다.


 여드름 가득한 피부, 아이돌로 활동했던 시절때와 비교하는 것이 미안해질 정도로 늘어난 체중, 감지 않아서 더러운 머리카락, 미용실에 간 지 일 년은 되지 않아 눈은 이미 다 덮은지 오래인 앞머리, 언제 갈아 입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목이 다 늘어난 꾸질꾸질한 티셔츠, 입을 열면 나는 역겨운 구취, 코만 조금 벌름거리면 쉽게 맡을 수 있는 시큼하고 쿱쿱한 체향. 이 모든 것이 다 역겹게 변해버린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냄세나는 특징들이었다. 


 나는 더이상 이런 역겨운 현실과 마주하는 것이 참을 수가 없어져 고개를 획 돌렸다. 이내 띵! 하고 전자레인지에서 조리를 끝냈음을 알리는 신호음이 울렸다. 그 안에서 피자를 빼 낸 나는 로딩이 끝난 TV게임 앞에 앉아 게임기를 손에 잡았다. 여러 음료수나 양념들이 찐득찐득하게 엉겨붙어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굳이 그것을 닦아내려고 힘쓰고 싶진 않았으므로 애써 찐득거리는 게임기를 무시하며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벌써 최종보스까지 쓰러트린지 오래인 게임이었지만, 나는 이것을 반복하는 것 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유우군, 게임하고 있었어?"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나는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저녁 아홉시. 게임을 시작한 것이 세시쯤이었으니 벌써 여섯시간째 나는 화장실 한 번 가지 않고 게임을 하고 있었다는 소리가 된다. 나는 구부정해진 등을 조금 꼿꼿히 세우곤 이즈미씨에게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삼일만에 보는 이즈미씨였다. 아무래도 이즈미씨는 모델로 잘 나가고 있으니까 얼굴을 볼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나는 다시 TV스크린에 집중했다. 이즈미씨는 아마 먹을 것을 만들 요량인지 부엌으로 들어갔다. 


 "유우군. 집이 엉망이네. 먹을만한 것도 없고."


 이즈미씨가 한숨을 쉬는 것이 여기까지 들려왔다. 이내 나에게 다가온 이즈미씨가 내 머리결을 만지며 '유우군 내가 감겨준 뒤로 머리 스스로 안감았지?'하고 물어왔다. 이제는 부끄러움도 없어진 나는 그 질문에 고분고분 고개만 끄덕였다. 


 "내가 없으면 머리 하나 못 감는구나. 유우군은. 뭐, 일단 머리부터 감고 초밥이라도 배달시키자."


 끄덕끄덕. 다시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즈미씨가 일으켜주는대로 일어나선 화장실로 향했다. 와이셔츠의 소매를 팔까지 걷어부친 이즈미씨가 샤워기를 틀어 물 온도가 적당한 지 손에 대보고 있었다. 나는 별 말 없이 샤워기에서 물이 흘러내리는 것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샤워기를 내 머리에 대는 이즈미씨의 행동에 흠칫했다.


 물의 온도는 적당히 맞춰져 있어서 조금 기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이즈미씨는 샴푸를 손에 조금 짜서 조심스레 내 머리에 거품을 냈다. 머리에 기름기가 많이 껴서 그런지 금방 거품이 사그라들고 미끌미끌 해졌다. 이즈미씨는 샴푸를 한 번 더 짜서 다시 거품을 냈다. 이번엔 거품이 풍성히 생겨났다.


 샴푸에서 사과향이 났다. 내가 이런 샴푸를 산 기억은 없으므로 아마 이즈미씨가 다 쓴 것을 교체해 준 모양이었다. 향이 나쁘지 않았다. 이즈미씨도 같은 브랜드의 샴푸를 쓰고 있으려나? 문득 궁금해졌다. 


 "유우군은, 정말 예쁜 얼굴이야."

 "다, 지난 이야기예요."

 "아니야, 유우군은 변함없이 예뻐."


 어째서 이 사람은 내가 이렇게 변해버렸는데도 여전히 날 사랑해주는 것일까. 어째서 이렇게 추악하게 변해버린 자신에게, 항상 예쁘다는 말을 속삭여 주는 것일까. 어째서 당신은 친구들이 나만 빼고 하늘로 가버린 그 날부터 나를 찾아와 나를 살뜰히 돌봐주려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 변해버렸는데, 어째서 당신은 이렇게 변함없이 날 사랑해주는 걸까. 물어볼까, 하다가 이즈미씨마저 내게서 떠나버리는 것이 무서워 결국 그 질문은 속에 담아두기로 했다.


 이즈미씨에게 사랑받기엔, 난 너무나도 가치없는 인간이다. 







  "유우군, 예뻐."

 

 척추를 쓸어내리는 이즈미씨의 손길에 한순간 몸이 차가워짐을 느꼈다. 나도 최근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는 등부분이 꽤나 예민하다. 그것은 발건한 것은 이즈미씨로, 그래서인지 이즈미씨는 애무를 할 때 등에 가장 많은 공을 들였다. 부풀어버린 이 몸뚱아리를 이즈미씨가 정면으로 바라보는 게 싫어서 나는 이즈미씨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즈미씨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을 보여달라는 이즈미씨의 요구에 나는 도리질을 치며 품 속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이런 추한 얼굴, 보여준다면, 이즈미씨가 당장이라도 떠날 것 같았다. 이즈미씨는 아름다운 것을 좋아했으니까, 이렇게 변해버린 나따위는 사실 속으로는 혐오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사실은 이렇게 변해버린 나를 속으로 비웃는 것이 재밌어서 혹은 추해버린 내가 불쌍해서 내 곁에 남아주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느쪽이어도 좋다. 이즈미씨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비웃음 당하던지 얼마나 동정 당하던지 그것은 알 바가 아니었다.  


 "유우군은, 내가 이렇게 만든거야."


 지금 나는 당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당신이 있어야만 살 수 있다. 








 "유우군은 내가 이렇게 만든거야."


 나는 그 대사를 다시 곱씹으며 자고있는 유우군의 등을 쓸었다. 아아, 나는 너무 행복한 남자다. 이렇게 아름다운 유우군을 손에 넣은 나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남자다. 나에게 이런 기회를 제공해 준 그 꼬맹이 삼인방에게는 진심을 다해 감사한다.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진 않지만 말이다. 그 애들이 이렇게 쓸모가 있을 줄은 몰랐다. 유우군과 붙어다닐때는, 정말로 죽여버릴까도 생각했지만 말이다. 


 그 꼬맹이들이 죽은 것은 교통사고 때문이었다. 그 사이에 유우군이 없었던 것은 정말,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유우군이 그 때 봉변을 당했다면 아마 나도 지금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운좋게도 유우군은 감기바이러스 덕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고, 나는 덕분에 유우군의 뒤를 따라 죽어버리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유우군은 그 날 이후로 트라우마같은 것이 생긴 모양이라서, 정말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집에서만 생활했다. 당연히 대학은 못갔고, 고등학교에서도 퇴학 처리 되었다. 하루종일 했던 게임만 반복하고, 그야말로 '무능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건 내가 얼마나 바라던 시나리온가. 유우군이 주변 인간관계와는 다 단절된 채로 오로지 내 시야 안에만 들어오는 그런 스토리는, 내가 몇 년을 꿈꿔오던 스토리란 말인가. 


 유우군은 그 날 이후로 변했다. 제 외모를 비하하는 일이 많아졌으며, 자존감이 바닥을 길 정도로 하락해 버렸고, 확실히 말수도 적어졌다. 유우군은 종종 자기 피부에 여드름이 너무 많이 나버렸다던가, 자기 체중이 너무 불어버렸다던가, 자기 몸에서는 역겨운 향기가 난다던가하는 말을 중얼거렸다. 아, 이것은 완벽한 내 세뇌의 결과이다. 유우군은, 지금은 오로지 나를 구원으로 삼고 있는 나의 유우군은, 내 말 한마디 한마디를 법이자 진리로 여긴다. 그러니까 지금의 유우군은 내가 이렇게 만든 것이다.


'유우군, 최근에 피부에 뭐가 자주나는것 같네.

'체중 조금 늘지 않았어?'

'안씻은지 꽤 됐구나?'-.


 내 작은 거짓말들을 너자신으로 내면화 시켜버렸구나. 아아, 나의 사랑스러운 유우군. 나는 들썩이고 있는 유우군의 등에 입을 맞췄다. 


사실 너는 변함없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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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유미코] 오타쿠의 연하남 01






"그래서 말이지! 이번에는 도색이 끝내준다니까? 전에 나왔던 버전이랑은 차원이 다르다고. 아 물론 전에 나왔던 버전도 나쁘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러니까 이건 …"


 벌써 몇 번째 듣는 이야기더라. 마유는 미코시바가 손에 조심스레 올려두고 있는 모에니메이션의 여주인공 피규어를 감정없이 바라보며 미코시바가 저 이야기를 벌써 몇번째 반복중인가 떠올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역시 생각하는 것도 귀찮아져서 마유는 대충 어림잡아 열번은 들은 것 같거니 짐작했다. 저런 플라스틱덩어리가 뭐가 좋은걸까, 하고 입에 올렸다간 아무래도 미코시바가 충격받아서 그것은 관두기로 했다. 하지만 주말에 애써 사람을 불러다 놓고 어제 온 피규어에 대해 자랑만 늘어놓고 있다니. 한시간 걸려 미코시바의 집에 도착한 의미가 없지 않은가. 


 마유는 벽시계를 바라보며 더 이상 들어주고 있다가는 아마 저 피규어의 픽셀단위 하나까지 외우게 될 것 같다고 생각해서 미코시바의 말을 가로막고 중간에 이 집에 온 본 목적을 여과없이 말했다. 


"형. 키스해주세요."


아, 당황했다. 미코시바는 귀까지 붉어진 마유의 얼굴을 보며 펑-하고 터지는 효과음이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 여기서 안아버리고 싶지만 조금 화낼려나. 역시 미움받는 것은 싫다. 사과하는 것에 익숙치 않으니 애초에 미움받고 싶지 않다. 그래도 조금, 가능하면 조금 더 닿고싶다.


 마유는 손을 뻗어 미코시바의 귓볼을 만지작거렸다. 귓볼이 이렇게 뜨거운 곳이었나. 몸까지 덜덜 떨고있는 미코시바를 보며 조금 가엽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조금 더 괴롭히고싶어지는 것을 보니 아마 치요의 말대로 자신은 도S인지도 몰랐다. 아직 제대로 실험해 본 건 아니지만 말이다.


"아, 아하하. 그...그래서 이번에 옥션에서 운좋게 구입한 건데 중고치고.."


 미코시바는 몸을 덜덜 떨면서도 마유의 말은 못들은 척 어물쩡 넘기려는 속셈인지 다시 피규어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이제는 머리끝까지 붉어져버렸는데도 이 사람은 내가 속아넘어가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마유는 귓볼을 좀 더 노골적으로 지분대다가 조금씩 미코시바를 벽 쪽으로 밀었다. 등에 벽이 닿았을 때 미코시바는 거의 울 듯 한 표정이 되어 있어서 마유 안의 가학심을 대놓고 쿡쿡 찌르고 있었다. 


"형. 키스해주세요."


 작년 이맘때 쯤 사귀기 시작해서 곧 1주년을 맞이하는 이 커플은 한달 전에 뽀뽀도 겨우 한 상태로, 그것도 대학 동기들과 술자리를 하고 온 미코시바가 분위기에 취해 어쩌다 한 것 뿐이지-그것도 키스도 아니고 뽀뽀였고- 다음 날 기억이 돌아오자 미코시바는 무진장 부끄러워서 거의 일주일 간 마유를 피해다녔다. 마유 자신도 스킨쉽이 무척 하고싶어 미치겠다거나 이런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이렇게 누구 하나 좀 더 발전하려 하지 않으면 분명 뽀뽀만 하다 끝나는 커플이 될 거라고 얼마전부터 경각심이 들었기 때문에 조금만 분위기가 잡히려고 하면 들이댔지만 막상 키스 한 번 하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이 사람의 이런 부끄러워하는 면 때문에 끌린 것도 있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지 않아? 하고 마유는 사실 조금 심통이 나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미코시바로부터 오늘 집에 놀러오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오늘이다! 라고 생각하고 날 잡고 온 건데.. 오자마자 거의 세시간을 피규어에 대한 설명이라니. 아무리 조용히 앉아 가만히 들어주는 것을 잘하는 저도 이쯤 되면 서서히 화가 날 만 했다.


 마유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서 눈만 꿈뻑이고 있는 미코시바에게 좀 더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고개를 조금 옆으로 돌려 입술을 마주대려 했다. 숨결마저 떨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마유의 마가슴도 숨결과 함께 불규칙하게 떨려왔다. 하지만 입술이 거의 닿기 직전의 순간, 마유는 미코시바의 손에 밀쳐졌다.  마유를 밀쳐낸 미코시바도 순간 놀랐는지 재빨리 사과하려고 입을 달싹였으나, 마유가 한발 빨랐기에 그 말은 허공에 흩어져 버렸다.


"형은 내가 싫어요?"


 아, 굉장히 무서운 얼굴이다. 미코시바는 마유가 화내는 것은 제게 처음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 잠시 숨을 멈췄다. 자신은 마유를 이렇게 화나게 할 속셈은 없었는데, 그저 조금 준비가 안되어 있었을 뿐인데, 아무래도 마유를 화나게 해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자식.. 그렇게 나가서 연락이 없어서.."

"그래서 미코링 나한테 사랑 상담하는거야?"

"치요오..."

"커플들 다 죽었으면..."


 얘가 대학가더니 대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 거야.. 미코시바는 귀여운 얼굴로 커플들은 다 죽어도 싸다는 말을 해대는 제 고등학교 동창에게 순간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한켠으로는 천하제일의 눈새라고 불리는 노자키에게 반해 오년째 짝사랑만 이어오고 있는 제 고등학교 동창이 좀 불쌍해지기도 했다. 다행히 노자키와는 같은 대학에 들어가서 이리저리 같이다니고 있긴 한데, 역시 아직까지 그냥 친구관계일 뿐이다.


 사실은 노자키는 너를 정말 이성으로 안보는 모양인데 포기하는게 좋지 않을까? 하고 조언해주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치요가 마시고 있는 저 에이드의 유리잔으로 머리를 강타당할 것 같아서 그것만은 참았다. 


"그래도 일년이 됐는데 뽀뽀 한 번 이라니.. 커플마다 속도는 다를 수 있지만 그건 너무 심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마유도 이제는 성인이고."

"하,지만 나 왠지 그녀석 얼굴만 봐도 좀, 좀, 그, 그거 있잖아, 치요 너도 잘 알 거 아니야. 뭔가 , 으 ,마, 만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게 막상 또, 부끄, 으아아아"

"더 이상 염장지르면 미코링이고 뭐고.."


 진심으로 사람 하나 죽일 듯 살벌해진 눈빛으로 치요가 에이드 잔을 집어들었다. 그 장면에 식겁해서 얼른 치요의 손을 끌어당겨 에이드잔을 겨우 뺏은 미코시바가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아, 그, 미안 치요. 그게 아니라 조금 , 흐, 어. 하여튼 그래서 나도 그, 그렇게 진도 나가는 건 생각해본 문제고 언젠간 해야한다고 당연히 생각하지만, 그래도 막상 그 타이밍이 되면 두려워진달까.."


 미코시바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애꿎은 냅킨을 주물럭거렸다. 자신도 남잔데 스킨쉽이 마냥 싫기만 하겠는가.. 다만, 다만 그 사랑받는다는 간질거리는 느낌을 참을 수가 없어서 언제나 마유가 한발짝 다가오면 두발짝 뒤로 물러서고 만다. 속으로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몸이 먼저 반응해버리는데 어쩌란 말인가... 아마. 마유는 많이 실망했을 것이다. 아무 이유없이 스킨쉽을 거절하는 애인이 있다면, 아마 내가 마유의 입장이었다면 실망하고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 연장자답게 리드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리드받고 있는 입장인데 이렇게 빼기만 하면... 


"아, 미코링. 말하는 도중에 미안한데 노자키군한테 호출와서, 나 먼저 나가봐도 될까?"


 오늘 에이드 사줘서 고마워. 치요는 손인사를 하며 재빨리 카페를 빠져나갔다. 야! 너는 사람이 말을 하고 있는데!! 미코시바는 에이드 잔과 함께 덩그러니 남겨진 제 신세를 한탄하며, 역시 세상에 믿을만한 친구는 하나 없다는 걸 오늘도 뼈져리게 깨달았다. 역시 우정보다 사랑인거냐.. 나도 번듯하고 멋진 애인이 있다고, 이자식들아. 그렇게 생각하니 마유가 또 보고 싶어져서 미코시바는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만 내렸다 올렸다 반복하며 마유에게 전화를 걸까 말까 거의 십분은 고민했다. 아무래도, 화나게 했으니 먼저, 걸어야겠지..? 미코시바는 훕- 숨을 들이쉬고 발신버튼에 손을 가져다 대려 했지만 아주 근소한 차로 미코링의 휴대폰이 먼저 울렸다. 


 "마유?"


 발신자는 노자키 마유여서 미코시바는 헉, 어쩌지 어쩌지, 를 연발하다 겨우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고 핸드폰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어쩐지, 조금 예감이 좋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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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츠마오] 비 내리는 어느 날




*12님께서 신청해주신 리츠마오 짧은 글입니다.

*주제는 비오는 날입니다.









"이왕이면 마군이랑 놀러가고 싶었는데."


 리츠는 베란다에 쭈그리고 앉아 덤덤한 듯 말을 꺼냈다. 사실 저렇게 덤덤한 척 하고 있어도 꽤나 실망하고 있다는 것을, 리츠와 거의 십년을 넘게 한 마오는 잘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유원지에 놀러가기로 한 날 이렇게 큰 비가 올지는 자신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는 걸. 어제까지만해도 해가 쨍쨍했는데, 어째서 내려도 오늘 비가 내리는 걸까ㅡ 하고 실망스럽기는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마오는 리츠를 먼저 달래는 것이 우선이라서, 베란다에 쭈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비내리는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리츠의 곁에 자신도 쭈그려 앉았다. 


"유원지는 다른 때에 가도 되니까 그렇게 실망하지 말라고."

"하지만 우리 동거한지 일주년인데. 표도 다 사뒀는데..."


 리츠는 제 바짓주머니에 꼬깃꼬깃 넣어둔 표를 꺼내 마오의 눈 앞에 팔랑팔랑 흔들었다. 표에 잡혀있는 주름들이 리츠가 유원지에 얼마나 가고 싶어 했는가를 증명해주는 것 같아 마오는 괜히 제가 미안해졌다. 분명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풀이 죽어있는 리츠를 보고 있으니 소풍취소된 아들내미를 보고있는 어머니의 심정마냥 가슴이 따끔따끔했다. 할 수 있다면 날씨를 바꿔서라도 유원지에 데려다주고 싶었지만 역시나 자신은 신이 아니니까 그건 무리다.


"DVD라도 빌려와서 영화라도 볼까?"


 마오는 리츠의 우울한 기분을 전환시켜주려고 요 앞 DVD가게라도 가서 영화라도 빌려볼 것을 제안했다. 리츠는 그다지 탐탁치 않아하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 푸딩도 사도 돼?하고 묻는 것은 옵션으로.  간식 하나 사먹는 것 까지 제게 허락을 구해오는 리츠가 귀여워져서, 마오는 물론이지-하고 만면에 미소를 띄웠다. 마오가 먼저 일어나 외투를 챙기려하자, 리츠는 마오쪽으로 양 팔을 크게 뻗었다.


"마-군. 나 일으켜줘."

"일어나는 것 쯤은 좀 혼자 해라."


 그렇게 불평하면서도 마오는 리츠의 양 겨드랑이를 끌어안아 끙차- 하고 리츠를 일으켜 세웠다. 리츠를 일으켜 세우자, 리츠는 그대로 폭 마오의 품에 안겨왔다. 으으응- 마군 이렇게 맛있는 냄새를 풍기다니 너무하잖아-하곤 리츠는 새끼고양이마냥 마오의 목덜미에 머리를 한껏 부볐다. 대체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고 얼굴이 붉어진 마오가 리츠의 몸을 밀어 리츠를 떼어내려 했으나 도저히 리츠는 제게서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얘는 운동도 싫어하는 게 어디서 이렇게 힘을 키워오는 거야.. 그나저나 얘 좀 체중 늘어난 것 같은데. 


"리츠, 너 점점 무거워 지는 것 같다. 요새 야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거 아니야?"

"음, 진짜? 그럼 운동이라도 할까."

"무슨 운동? 너 운동하는 거 엄청 싫어하잖아."

"섹스가 그렇게 칼로리소모가 높다던데"

"사쿠마!!"

"에, 장난이야 장난."


  사실 그렇게 장난인 것만도 아니지만, 하고 마오가 기겁할 만한 사족을 덧붙이며 리츠는 마오의 품에서 떨어져 쇼파의 행거에 걸려있는 얇은 가디건을 아무렇게나 주워입었다. 가디건의 안감과 겉이 뒤바뀐 채였지만 리츠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슬렁슬렁 현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곧 예리한 마오의 눈에 걸려 그것을 지적당하고 말았다.


"리츠! 너 뒤집어 입었잖아."

"음, 아, 그러네. 귀찮으니까 이대로 가자."

"같이 다니는 내 입장은 생각 안하냐!"


 진짜 손이 많이 간다니까- 라고 잔소리하면서도 마오는 다정한 손길로 리츠의 팔을 들어올려 가디건을 벗겨냈다. 어떻게 이 상태로 바깥에 나갈 생각을 한 건지! 마오는 가디건을 뒤집어 리츠에게 다시 입히며 이것저것 쫑알쫑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 모습이 흡사 신데렐라의 계모와도 같아서 다른 사람의 반응에 둔감한 리츠도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불만스럽다는 듯 말을 뱉었다.


"으으 마-군 시끄러워."

"네가 제대로 하면 이런 일도 없.."

 

 뒷 말이 이어지지 않은 것은, 리츠의 입술이 쉴새없이 잔소리를 늘어놓던 마오의 입술을 막아버렸기 때문으로 마오는 그대로 굳어있다가 농밀히 혀를 섞어오려는 리츠때문에 그제서야 정신차린 듯 화악- 리츠를 밀쳐냈다. 


"마-군은 부끄럼쟁이. 이제 키스는 익숙해질때도 됐는데."


 마오는 어릴때는 너무나도 순진하게 자신을 따랐던 리츠의 얼굴을 잠시 떠올려보다, 누구것인지 모를 타액으로 입술을 번들거리며 농염한 눈빛으로 마오의 위아래를 훑고 있는 지금의 리츠와 비교해 보았다. 얼굴은 그때 그대로 잘 자라 준 것 같지만.. 


"마군, 우리 오늘은 영화말고 섹스할까?"


 아. 내가 어릴때 부터 호랑이 새끼를 주워길렀구나.. 어릴 때는 그렇게 귀여웠는데... 결국 그 귀여운 얼굴에 넘어가버린 내 탓일까.. 


 비는 점점 잦아들었지만, 어째선지 마오의 마음은 점점 착잡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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