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마코] 우상철회 03








 겉보기엔 평화로웠다. 언제나 그렇지 않은가, 중요한 전투 전에는 모든 것이 평화롭고 고요한 법이다. 일상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전쟁 전의 평화에는 일종의 긴장감이 곁들여져 있다. 마코토도 그랬다. 별 거부감 없이 새 집에는 잘 적응해 나갔고 새로운 가족들과의 관계는 원만했으며 전학 간 학교에서도 모범생이라고 칭찬을 받는 둥 일상에 평화가 찾아왔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그 화풀이를 위해 마코토를 욕하고 때리던 어머니는 이제 없었다. 속은 썩디 썩어버렸지만 겉만은 최고로 번지르르한 과일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 겉은 번지르르하더라도 그 안에 애벌레가 과육을 다 헤쳐놓고 있는 쭉쩡이는 조금만 건드려보면 티가 나기 마련이었다. 


 새어머니와 아버지가 결혼기념일이라며 2박3일로 오사카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이즈미와 마코토는 같은 쇼파에 앉아 의미없이 예능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사실 마코토는 별로 저 예능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최근에 친해진 아이들이 하도 재밌으니 한번만 보라고 권유해왔기 때문에 거절하기도 뭣해서 어쩔수 없이 이번편만이라도 보자고 생각하며 보던 중이었다. 한번도 tv보는 모습을 보인적 없던 이즈미가 리모콘을 만지작거리던 마코토의 옆자리에 앉았을 때는 자리를 뜨고 싶었으나 그건 너무 노골적인 반응 같아서 적당히 십분만 더 보다가 방으로 들어가자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유우군은 참 뻔뻔해. 나같으면 못할거야. 자기아빠와 바람 난 여자의 가정에서 사는거."


 마치 '저 예능 재밌지 않아?'라고 묻는 것 같이 단조로운 표정으로 이즈미가 물었다. 여전히 tv 브라운 관에서 시선은 떼지 않은 채였다. 말의 내용이 지독하지만 않았더라면 마코토는 아마 이즈미를 무시했을 것이다. 마코토는 이 집 식구들과 모두 두루두루 잘 지내고 있었지만 이즈미만은 예외였다. 그렇다고 딱히 혐오하는 반응을 노골적으로 보인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식구들 처럼 먼저 사근사근하게 다가가서 관계를 원만히 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 집안에 살고 있는 어색한 남처럼 이즈미를 대해왔다. 그런데 저런 폭탄같은 발언을 해올 줄이야. 하긴,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걸 간과한 것은 아니다. 어렸을 적에도 꽤나 자기 중심적으로 살고 있던 이즈미지만 저렇게까지 포악한 인간이었다니. 하지만 더욱 문제인 것은 저 도발에 넘어가버린 자신이었다.


 "이즈미씨만 하겠어요? 저같으면 못할걸요? 새아버지의 전아들이랑 이렇게 나란히 앉아있는거."

 

 이즈미가 tv에 고정시켰던 시선을 서서히 떼서 마코토에게 돌렸다. 이즈미에게 조금이라도 상처주고 싶었는데 마코토의 말이 이즈미에겐 이상하게 작용했던 것 같았다. 마주친 이즈미의 눈동자 속에는 웃음이 서려있었다. 직접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눈빛이 '그러게 빼앗긴 네 쪽이 잘못 아니야?'라는 비웃음을 함축하고 있었다. 주먹이 나간 것은 그 다음이었다. 그 주먹이 이즈미의 얼굴에 보기좋게 박혀버렸다면 좋았을련만 그 시나리오는 보기좋게 구겨졌다. 탁-, 너무나도 손쉽게 이즈미가 자신의 주먹을 잡아채자 마코토는 당황했다. 여자친구의 앙탈을 손쉽게 잡아채는 남자친구처럼 이즈미는 참으로 쉽게 마코토를 제어했다. 이즈미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이럴때도 이즈미가 잘생겼다고 느껴버리는 제 뇌를 뜯어버리고 싶었다.


 "워워ㅡ. 형을 때리는 동생이라니. 버릇없는 동생은 키운 적이 없는데, 나는."

 "동생이라고 하지마요. 존나 역겨우니까."

 "뭐, 나도 널 동생으로 볼 마음은 없는데. 이제부터 안 봐줘도 되지?"


 사각사각-, 애벌레가 마음 속을 엉망징창으로 갉아먹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 속에 사는 애벌레에겐 먹는다는 행위에 일정 규칙이 없어서 이곳 저곳 생각도 못한 모양으로 마음을 갉아먹어 버린다. 세나 이즈미가 자신의 위에 올라탔다. 사각사각사각사각, 귓가가 시끄러웠다. 이제는 뇌까지 갉아먹으려는 모양이었다. 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 … , 낯선 체온이 마코토의 가슴팍 위로 올라왔다. 낯선 손길이 그런 가슴을 난잡하게 지분거렸다. 한껏 발길질을 했다. 천장의 무늬가 눈가를 어지럽혔다. 제 바지는 부드러운 손길에 의해 벗겨져 저만치 던져졌다. 아!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마코토의 중심부터 뇌까지 뚫어버렸다. 뇌가 부스러졌다. 숨 넘어가듯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즈미가 웃었다. 저 입가의 미소만 거둬버릴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자신의 애처로운 숨을 신께 바칠 의향이 있었다.


 아아, 박수갈채가 들렸다. 자신만 빼고 모두들 즐거워 하는 무대 위에서 마코토는 나체인 몸이 찣어발겨지도록 굴려졌다. 퍽퍽퍽 -, 난잡하고 음란한 효과음이 아래로부터 들렸다. 원래는 무언가를 넣을 용도로 만들어지지 않은 그 곳은 불가항력으로 역류당했다. 하읏, 자신의 위에서 교미의 쾌락으로 신음하는 이즈미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마코토는 저 악인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겠노라 맹세했다. 악인은 제 영웅이었던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픔으로 인해 생리적인 눈물이 흘렀다. 이즈미의 땀방울이 제 안경의 유리알에 떨어져 시야를 방해했다. 


 "난 널 동생으로 볼 생각이 없어."

 

 절정에 근접해있는 들뜬 목소리가 마코토에게 말했다. 이내 뱃속은 따듯한 액체로 푹 절여졌다. 


 "난 …난, 당신을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 … 앗, 어요 …, 절대로."

 "그것 참 유감이네."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거야. 당신의 어머니를 용서하지 않을거야. 내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을거야. 


 "난 널 절대로 포기할 생각이 없거든."


 이즈미로부터 뿜어지는 욕정은 나를 향해서만 곧게 뻗어있어서 그 크기를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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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코가] 반례 02







 이 학교에 들어와서 안 사실이지만 학교내에서도 유닛에 따라 권력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그저 순수히 음악만 하기 위해서 이 학교에 온 나야 그런 것 따위 알리가 없었지만 이 학교 학생이 된 이상 아주 모른척 하고 살 수도 없었다. 사쿠마 레이는 유메노사키의 권력 집단인 'fine'에게 대항하려고자 하는 몇몇 반역자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아니 사실은 그 반역자들의 수장과도 같은 존재였다. 반역을 꿈꾸는 그 눈동자에는 자신감이 충만해 있어서 그당시의 나는 그 눈동자를 보고 사쿠마 레이를 또다시 멋지다고 동경해 버렸다. 모두가 힘들다고 하는 싸움이었지만 나는 내심 그가 이기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사쿠마 레이가 비상하기를 바랬다. 그의 무궁한 가능성을 믿었다. fine따위는 아무래도 좋으니까 그가 언제나 반짝거리는 상태로 사람들의 무수한 동경을 받는 스타로서 남아주길 바랬다. 녀석은 충분히 그래도 될 만큼의 가치가 있는 놈이 었으니까.


 녀석을 동경하고 나아가 녀석의 곁에 머무는 사이에 나에게도 꽤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무의식중에 녀석의 말투가 멋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내 말투는 어느새 녀석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그 외에도 녀석을 중심으로 생활이 돌아가게 되었다. 뒤늦게 사랑에 빠진 사춘기의 소녀마냥 그자식이 좋아한다는 음료를 사서 건넸고 그자식이 한번이라도 더 나를 보게 하기 위해서 이미 익힌 안무를 모른다는 듯이 녀석에게 묻곤 했다. 정말이지 다시 돌아보면 부끄러울 정도의 애정표현이었다. 내 짝사랑이 점점 색을 더해가는 동시에 녀석의 반역도 점점 진전을 더해갔다. 학생들은 이때를 유메노사키의 암흑기라고 부른다. 평범한 고등학교 생활을 기대하고 입학했을 학생들은 살벌한 파벌싸움에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결국 사쿠마 레이는 졌다. 


 사쿠마 레이의 날개가 꺾인 것은 참으로 유감이었다. 하지만 그 반역에서 이기지 못했다고 해서 사쿠마 레이에 대한 동경심이 한순간에 꺼져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열심히 노력했던 녀석을 곁에서 지켜봐왔기에 반역이 성공하지 못했을 때는 그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을 뿐이지 그래도 녀석을 우상시하던 나의 사고는 바뀌지 않았다. 녀석을 향한 동경심을 철회해 버린 것은 녀석이 서서히 자신을 갉아먹고 게다가 도피하듯 유학까지 가겠다고 선언한 때였다. 


 그렇게 전력을 다해서 움직인 싸움에서 fine를 결국 꺾지 못해 실망한 마음은 어렴풋이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일 뿐이다. 사쿠마 레이는 그저 사쿠마 레이로 있어주면 그것으로 충분할 뿐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너무나도 변해버렸다. 이녀석은 진짜 체력의 한계라는 것이 있는걸까?하고 의심하게 만들었던 그 쌩쌩한 체력조차 반역이 실패한 이후 급속히 떨어졌다. 녀석은 하루종일 관에서 잠만 잘 뿐이었다. 경음부에 놓아진 관을 나는 밉다는 듯이 두어번 찰때도 있었다. 얄궂게도 관은 참 튼튼해서 기스 하나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쿠마 레이가 꼴보기 싫을 때는 녀석의 관을 찼다.


 유학을 간다고 선언한 녀석은 마지막으로 유닛과 동아리 멤버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인사를 고했다. 지독한 날짜 선정이었다. 굵은 빗방울이 귀에 거슬릴 정도로 땅을 쳐대는 날씨였다. 녀석이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경음부 부실이었다. 경음부 부원들은 녀석의 안녕을 바라며 그에게 잘되라는 둥 건강하라는 둥 듣기 좋은 소리만 골라 건냈다. 녀석은 애매한 미소를 흘리며 마지막으로 나에게 악수를 청해왔다. 하지만 난 대놓고 노골적으로 녀석을 무시했다. 사쿠마 녀석은 끝내 나에게 악수를 받지 못한 텅 빈 손을 바라보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부원들은 나에게 눈치를 주었지만 나는 어쨌거나 막무가내였다. 


 흡혈귀녀석이 나가버리자 경음부원들도 각자 부실을 나가버렸다. 부실에 남은 것은 나 혼자였다. 나는 경음부의 창가에 걸터앉아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경음부 부실은 운동장이 가장 잘 보이는 창가쪽에 있어서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을 향해 걷고 있는 사쿠마 녀석의 뒷모습을 보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녀석의 퇴장에 어울리는 지독한 빗방울이 쏟아지고 있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녀석은 저 어깨에 유메노사키의 전부를 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제 하나 지기도 벅차하는 저 어깨는 얼마나 애처로운가. 

 

 "이새끼야!"


 사쿠마 레이를 붙잡은 것은 무의식의 반영이었다. 사실 끝까지 무시해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녀석에게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인식해버리자, 그 애처로운 어깨에 남겨진 영광의 잔향을 기억해내자 울분의 목소리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가버렸다. 녀석은 뒤를 돌아서 곧은 시선으로 경음부 부실쪽을 바라보았다. 이내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비를 맞고 있었다. 이런 날 우산 하나 챙겨오지 않다니. 도대체가 자신은 왜 저런 얼뜨기를 이제껏 좋아해왔는지 모르겠다. 정말이지 시간 낭비다.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자신보다 학년도 어린 후배가 반말을 해오는데도 흡혈귀녀석은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인지 그 자리에 서서 조용히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이제까지 항상 존댓말을 써왔고, 사쿠마 선배라고 제대로 부르고 있었는데 어째서 아무렇지도 않게 반말이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녀석에게 더이상 비를 맞게 할 수 없어서 아침에 편의점에서 사 온 비닐우산을 오른손에 들고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녀석을 향해 뛰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녀석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이정도 밖에 없다. 녀석이 점점 가까워졌다. 운동장을 달렸다. 비를 맞은 채. 사실 우산을 펴서 썼으면 될 일이었지만 그 사실조차 잊을 정도로 다급했다. 이제 더이상 못 볼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이 들자 최고속도였던 내 달리기는 더욱 가속도가 붙었다. 녀석의 앞에 섰다. 비에 절은 녀석의 몸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패배자의 향기가 났다.


 "우리 멍멍이는 착하네. "


 녀석은 이렇게 말하며 진심으로 환하게 웃었다. 이미 비는 홀딱 맞은 상태였지만 나는 녀석의 앞에서 우산을 펴서 녀석의 머리 위에 씌웠다. 싸구려 비닐 우산따위와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런 사람이었다. 조금 더 좋은 우산을 사올 걸, 하고 잠시 후회했다. 


 "하지만 아직 똑똑한 멍멍이는 될 수 없는 모양이구나. 우산이 있는데도 굳이 그걸 쓰지 않고 주인에게 달려오다니. "

 "누가 … 누가 니 멍멍이라는거야, 진짜… 죽고싶냐?"

 

  눈물이 흘렀다. 상관없었다. 이때만큼은 울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빨리 돌아와라, 네 녀석. 다음엔 … 다음엔 내가 네 녀석을 쳐 부술거니까. 더, 더 강해져서 오라고!"

 

 결국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은 녀석에게 말해주지 못했다. 나는 너를 좋아하고 있다는 이 단순한 문장이 왜이렇게도 말하기 힘들었는지. 내 머리를 손으로 잔뜩 헝클어놓은 것을 마지막으로 교문을 떠나는 사쿠마의 진짜 마지막 뒷모습을 끈질기게 응시하면서 나는 좋아한다고 자그마하게 중얼거려 보았다. 사실 그날 나는 네게 고백했었다. 세상의 모든 잡음을 묻어주는 빗소리의 힘을 빌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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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코가] 반례 01


 





 아이돌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니 사실은 아이돌이라는 존재를 몰랐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7살의 생일선물로 기타를 품에 안아본 그 순간부터 내 인생은 오직 음악이라는 것에 맞춰져 달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실 음악에 전력을 쏟아부을 수 있었던 것은 어느정도 잘 살았던 집안과 인간불신이라는 모토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내 타고난 외톨이 기질 때문인지도 몰랐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음악을 하고 싶다는 말에 담임은 유메노사키라는 고등학교를 나에게 귀띔해줬다. 본가와는 조금 거리가 있어서 만약 합격한다면 자취를 해야하는 곳이라는 조건을 달았지만 아마 이 낮은 성적으로 그런 명문고등학교를 붙게 된다면 부모님은 기어이 눈물을 흘리시며 얼마든지 자취비를 대주실 테니까 걱정은 없었다.


 유메노사키에 견학을 간 것은 원서를 쓰기 일주일 전, 외부인에게 개방하는 드림패스인지 뭔지를 하던 기간이었다. 사실 아이돌인지 뭐시기인지 하는 것들이 음악을 알아봐야 얼마나 알겠냐는 삐뚤어진 마음으로 향한 곳이었다. 학교 안에는 쓸모없이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었다. 관객들의 대부분은 여학생들이라서 내 얼굴은 금세 질색이 되었다. 그중에서는 'fine'이니 '사쿠마 레이'이니하는 응원굿즈들을 들고있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아까 복도에서 팔던 것들을 보며 저런게 팔리겠어?하고 코웃음쳤던 내가 무안해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응원굿즈를 든 채 관객석에 앉아 있었다. 이보라고들, 그 굿즈 하나 살 돈으로 아프리카 아이들 몇끼를 먹여살릴 수 있는 줄 알아? 라고 호통쳐주고 싶었으나 굳이 모르는 사람에게 시비 걸 정도로 난 용기있지 못했다.


 그렇게 앉아있으니 곧 몇팀의 공연이 지나갔다. 물론 그 중에서야 몇몇 괜찮은 노래를 하는 놈도 있었으나 여자애들에게 비위를 맞추기위해 일부러 달아빠진 노래를 하고 있는 놈들에게는 도저히 신뢰가 가지 않았다. 이곳에 오면 마음껏 음악할 수 있다고 해서 원서를 넣으려고 한 것인데, 저렇게 팀을 꾸려서 활동을 해야만 한다면 나는 자신이 없었다. 내가 원한 것은 그저 홀로 하는 음악이기 때문에 차라리 집 근처의 일반고를 넣어서 방과후에 음악에만 매달리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해갔다. 이곳까지 견학을 온 시간은 아깝지만 역시 이 학교랑은 연이 없나보다-하고 자리를 뜨려할 때, 그 때 내 인생을 바꿔놓은 목소리가 나를 잡아챘다. 정말이지 그때 조금만 늦었더라면 내 인생은 아주 많이 달라졌을 거라고 나는 장담할 수 있다. 


"여러분, 즐기고 있어?"


 왜 그 목소리가 유독 시선을 채갔는지 아직까지도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다. 하지만 원래 인생사란 이해하려 들 수록 이해하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지는 것 아니겠는가. 아니면 흡혈귀녀석이 항상 주장하듯 그가 진짜 흡혈귀라서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는지도 몰랐다. 사실 그 웃기는 농담에는 조금이나마 대꾸해주고 싶은 마음도 없으나 가끔은 정말로 그녀석이 흡혈귀가 아닌지 의심가는 순간은 종종 있다.


 우습게도 내가 흡혈귀녀석의 목소리에서 헤어나오지도 못한 그 사이에 라이브무대는 시작되었다. 솔직히 노래자체는 앞서 불렀던 녀석들보다 월등히 잘 부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을 끄는 무언의 힘이 더해져서 노래에 집중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옆자리에 앉은 여학생이 '사쿠마 레이 너무 멋져..'하고 감탄사를 흘리기에 나는 그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었다. '사쿠마 레이.' 내 의지에 의해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기는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날로 돌아가서 나는 유메노사키에 원서를 썼고, 당당히 합격자 명단에 오오가미 코가라는 이름을 올렸다. 정말이지 그녀석과 같이 음악할 생각으로 그때는 무척이나 들떠있었다.


 유메노사키에서 입학허가장이 날라온 그 날, 어머니는 내 앞에서 아이처럼 엉엉 우셨다. 질 나쁜 학교에 가서 질 나쁜 아이들이랑만 어울리는 거 아닌가 하고 나름대로 마음 고생을 하신 모양이었다. 내가 그렇게 부모님 걱정만 시키는 못된 아들이었나 …하는 충격도 조금 있었지만 그래도 명문고에 합격했으니 그 걱정은 실현되지 않은 셈이었다. 아버지도 내심 말은 하지 않으셨지만 코끝이 조금 빨갰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그 날 밤은 고기파티였다. 너무 많이 먹어서 이대로 아이돌치곤 몸매가 뒤딸린다는 이유로 퇴학당하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많이 먹었다. 그렇게 레온과 둘이서 도쿄에서의 자취를 시작했다. 


 

 입학하는 날은 벚꽃이 만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래도 4월이다보니까 전국 어느 학교에가나 벚꽃이 만개했겠지만 유메노사키의 벚꽃은 유독 더 아름다웠다. 아무래도 아이돌학교다보니까 심미성을 중요시 여겨서 학교의 나무 하나하나까지 잘 정돈해서 였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교문을 지나자마자 쉴새없이 내 앞으로 건네지는 동아리 홍보지에 나는 지레 기겁을 했다. 교문에서 교실까지 이동했을 뿐인데 홍보지는 내 품 안에 한아름 안겨 있어서 처치 곤란할 지경이었다. 그것들을 그대로 쓰레기통 안으로 직행시키고 나는 창가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아무래도 한 반의 인원이 적어서인지 같은 반의 동급생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시덥지 않은 인사치레를 해오길래 나는 싹 다 무시한 채 오로지 이것 하나만을 물었다. 


 "너, 사쿠마 레이라고 알아?"


 역시 그 녀석은 꽤 유명한 모양이었다. 그 동급생 녀석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줬다고 생각해서 기쁜 것인지 제가 아는 온갖 정보를 떠벌댔다. 아직까지도 그때의 그녀석에는 조금 감사하고 있다. 그렇게 나는 그 동급생녀석에게 얻어낸 정도를 바탕으로 사쿠마 레이가 멤버로 있는 유닛에 들어갔고, 그녀석과 같은 동아리를 택했다. 그리고 유닛 모임이 있어서 그 녀석을 제대로 처음 대면했을 땐 나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비현실적으로 생겨도 되나하고 쓸모없는 걱정까지 할 정도였다. 그때는 멀어서 거의 성냥개비 수준의 녀석을 봤기 때문에 목소리로만 녀석을 기억했지만, 사실 얼굴까지 몹시도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사쿠마 레이라는 남자는.


 "안…녕하세요, 사쿠마 선배님"


 그가 날 보고 오른손을 건네왔다. 악수를 하자는 의미였다. 나는 평범한 악수요청 하나에도 너무나도 긴장해버려 청심환이라도 하나 먹고 올 걸 하는 후회를 할 정도였다. 내민 손을 잡았다. 혹시 손바닥으로도 심장의 빠르기가 느껴지는 게 아닌가 걱정될 정도로 심장이 격하게 뛰었다. 첫 기타를 선물로 받은 7살의 그 날도 이렇게 설렜던 것 같다. 





* 제목을 뭘로 할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냥 반례로...

반례제 떡밥 최곱니다..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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