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케이] 군주론 01





 "저 분이 네가 자라서 모시게 될 에이치 도련님이란다, 어서가서 인사드리렴 케이토."


 아직 제 몸 하나 감당하기 힘든 열 살 아이에게 부모는 네가 모셔야 할 사람이라며 정원에서 놀고 있는 작은 소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이는 그 손가락을 응시하다가 그 손가락 끝에 걸려있는 어느 소년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햇빛에 반사된 소년의 금빛 머리칼이 반짝-하고 빛났다. 꼬마는 아직 케이토 부자를 발견하지 못한 듯 한창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케이토는 아버지의 바지춤을 붙잡고 저낯선 꼬마에게 다가가기 싫다라는 나름의 반항을 몸으로 표현했으나 아버지는 냉혹하게 케이토의 등을 떠밀 뿐 이었다. 


 케이토는 조금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낯가림이 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왜인지 저 아이와 친해지는 것은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원래 하라면 더 하기 싫은 것이 인간의 심리 아니겠는가. 게다가 저 아이의 뒷모습에선 아직 열 살의 머리로는 정확히 정의하긴 힘든 어떤 불쾌한 기운이 스물스물 피어오르고 있었다. 학교에서 이유없이 친구를 따돌리는 것은 좋지 않다고 배워왔으나 저 아이에겐 어째서인지 다가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이것은 자신을 강자로 인식하고 자신보다 못한 약자를 짓밟고싶다는 잔인한 욕망이 아니였다. 오히려 자신을 약자의 위치에 두고 강자를 보면 있는 힘껏 줄행랑치고 싶어하는 약자의 논리에 가까웠다.


 케이토가 에이치에게 다가가는 것을 망설이자 케이토의 아버지는 엄한 표정으로 아들을 내려다 보았다. 그 얼굴에는 아들에 대한 실망감이 엿보였다. 저 아이와 친해지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아버지를 무척이나 실망시키는 일인 것 같았다. 케이토는 내키지도 않는 상대와 억지로 친구가 되는 것은 싫었으나 그때문에 제 아버지를 실망시켜 드리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케이토는 결심한 듯 제 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는 금발머리 소년에게로 다가섰다. 부슥, 잔디가 신발 깔창에 짖이겨 지는 소리가 들리자 소년은 고개를 돌렸다. 소년은 고개를 조금 위로 올려 케이토를 쳐다보았다. 아무런 적의가 없는 깔끔한 시선이었다.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큰 눈을 여러번 깜빡였다. 그리고 그 조막만한 얼굴에 단정하게 위치하고 있는 조그마한 입술을 오물거렸다.


 "넌 누구야?"

 

 소년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소년의 얼굴을 보자 아까의 적의심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마음 한켠으로는 이렇게 아름다운 아이와 친구가 될 수 있다니!하는 일종의 자부심이 가슴 한 켠에서 피어났다. 사람의 마음이란게 참으로 이렇게 갈대같은 것이다. 케이토는 얼굴을 부드럽게 풀었다. 그리고 가볍게 한 손을 내밀었다.


 "난 케이토야. 오늘은 아빠를 따라서 이 집에 왔어. 너는 텐쇼인 에이치지?" 


  소년이 귀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의 햇빛과 닮은 금빛머리칼이 고갯짓에 맞춰 살랑살랑 흔들렸다. 아버지가 그를 '도련님'이라고만 하지 않았다면 필히 여자아이로 착각했을 법한 예쁘장한 외모였다. 소년의 귓볼이 조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조금 낯을 타는 성격인 것 같았다. 저와 동갑이라고는 했지만 자신보다 한참은 어린 듯한 인상을 주었다. 


 "뭘 하고 있었어?"

 "나비와 놀고있었어."


 소년은 날개가 갈가리 찣긴 노란 나비를 케이토쪽으로 내밀었다. 나비의 몸통은 괴로운 듯 팔다리를 필사적이게 버둥거리고 있었다. 자세히보니 더듬이도 한 쪽이 부자연스럽게 꺽여져 있었다. 아마 태어날 때 부터 저런 나비는 아니었을 것이다. 누군가 저렇게 나비를 학대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학대의 주범은 아마도 천진난만한 얼굴로 나비를 내밀고 있는 이 소년이겠지. 케이토는 아까 느껴졌던 이질감이 다시 꿈틀 움직이려는 것에 놀랐다.


 아니다, 이 소년은 그저 순진한 것일 뿐이다. 그래, 잠자리의 날개를 떼며 노는 것은 사내아이라면 어렸을 적에 누구나 해봤던 사악하고도 순진한 장난 아니던가. 그런 것과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케이토는 나비에게 애써 시선을 주지않으려고 노력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어디선가 나비의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




 "우리 에이치가 케이토군을 참 잘 따르는 군요. 우리 애가 제대로 된 친구나 사귈 수 있을까 많이 염려하고 있었는데 케이토군 덕분에 여러모로 학교도 잘 다니고 있는 것 같아요."


 매달 한번씩 텐쇼인가와 하스미가가 어울리는 식사자리. 케이토와 에이치에 대한 이야기가 화두로 떠올랐다. 케이토는 입을 다물고 묵묵히 스테이크를 썰 뿐이었다. 자신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것은 어딘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되게 에이치는 제 아버지의 옆에서 화사하게 웃으며 케이토라는 주어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참 많이도 늘어 놓았다. 케이토가 어제 자신의 미술숙제를 도와줘서 선생님께 칭찬받았다느니, 최근에는 케이토덕에 성적이 올랐다느니 하는 둥의 시시콜콜한 이야기였다. 사실 에이치는 케이토보다 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으나 그런 식으로 종종 케이토를 띄워주곤 했다. 케이토도 사실은 그것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하하. 이녀석. 그렇게 케이토가 좋냐. "


 텐쇼인 기업의 회장직을 꿰차고 있는 남자가 쉬지않고 케이토에 대한 이야기를 조잘거리는 제 아들에게 물었다. 에이치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런 아들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두어번 쓸으며 회장은 생각에 잠겼다. 회장은 에이치에게 일종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미는 노산의 후유증으로 결국 에이치를 낳고 얼마 안 되어 하늘로 가버렸고, 홀로 남겨진 자신의 아들을 바쁘다는 이유로 유모의 손에 맡겨버린 것은, 어쩔수 없던 것이지만 그래도 아비로서 마음이 편치 못한 게 당연한 것이다. 제 아들은 언제나 해맑게 웃고 있었으나 가끔 그 웃음 뒤로 보이는 고독은 살대로 살아온 어른이 보기에도 감당하기 힘든 것이어서 종종 회장은 에이치가 나중에 커서 사회부적응자가 되는 건 아닐지 걱정에 휩싸이곤 했다. 케이토군을 만나고 난 후에는 그 눈빛에서 고독은 읽을 수 없게 되었으나, 대신 그 자리엔 야생의 무언가가 채워져 있었다. 


 종종 케이토를 바라보는 에이치의 눈빛에선 우정 그 이상의 분위기가 흘렀다. 회장이 그것을 느낀 것은 한 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회장은 애써 부정했다. 어미잃은 새끼가 너무 가여워서, 아비는 그 앞에서 눈이 멀었다. 아비는 그저 제 자식이 행복하기만을 바랄 뿐인 존재인 것이다.


 



*




 하지메가 놀러왔다. 하지메는 에이치의 먼 친척으로 어디 제약회사의 외동딸이라고 했다. 텐쇼인 회장은 에이치에게 하지메와 잘 놀아주라며 당부했지만 에이치는 초등학교 저학년 여자아이따위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듯 그저 방에서 밀린 방학숙제를 할 뿐이었다. 마침 케이토도 에이치의 집에서 같이 숙제를 하고 있었기에 그녀와 조우할 수 있었다. 한 손에 제 몸뚱이만한 곰인형을 끌며 나타난 그녀는 꽤나 낯을 가리는 성격인 듯 에이치의 방 한 구석에 앉아 그저 분홍색 곰인형을 가지고 놀 뿐이었다. 에이간단히 그녀를 무시한 채 케이토와 숙제 중이었다. 케이토는 그렇게 단순히 혼자놀고 있는 어린아이를 무시할 수만은 없어서 숙제를 하는 동안 틈틈이 그녀 쪽을 흘끔거렸다. 


 "케이토 이 부분 좀 알려줘."


  케이토가 곰인형의 리본을 다시 매주고 있는 하지메를 힐끔 바라보고 있자, 그 곁에 있던 에이치가 어딘지 심통이 난 목소리로 문제집의 마지막 문제를 툭툭 쳐댔다. 케이토는 너무 간단한 수준의 문제에 갑자기 기가 막혔다. 앞서 말했듯, 모든 교과 과목에서 에이치의 성적은 케이토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뛰어났다. 특히 수학에 있어서는 에이치는 중학생인 주제에 대학교 과정의 수학을 가뿐히 풀어버리고 만다. 그런데 겨우 이런 시시콜콜한 문제나 물어보다니. 갑자기 에이치의 머리가 멍청해 진 게 아니면 분명 어딘가 제 마음에 안들어서 심통을 내는 것이었다. 케이토는 에이치의 변덕까지 일일히 받아주는 좋은 친구는 아니었기에 간단히 에이치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기고 한숨을 쉬었다.


 "이정도는 니가 풀 수 있잖아. 니가 풀어."

 

 하지메가 이 쪽을 바라봤다. 둘의 투닥거림을 조금 부럽다는 눈으로 바라본 것 같았다. 내성적인 성격의 그녀에게 그다지 친구가 많을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아마 이쪽에서 말 걸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케이토는 잔뜩 입이 나온 에이치를 간단히 무시하고 구석에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하지메에게로 다가갔다. 


 "하지메아가씨. 저라도 같이 놀아드릴까요?"


 케이토는 하지메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공손히 앉았다. 제게 관심을 가져 준 것이 기쁜 듯 하지메는 어린아이다운 순수한 웃음으로 화답하더니 케이토에게 제가 들고 있던 곰 인형을 건내주었다. 아마 그것으로 같이 놀아달라는 뜻 같았다. 기본적으로 케이토는 아이들을 좋아했기 때문에 곰인형을 들고 평소엔 내지않는 가성으로 복화술까지 해보이며 하지메를 기쁘게 해주었다. 꺄르륵 거리며 박수를 치는 하지메를 보니 이렇게 귀여운 여동생이 있으면- 싶었다. 


 "..읏!"


 그때였다. 에이치쪽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케이토가 뒤를 돌아보니 에이치가 제 손가락을 쥐여잡고 아픈 듯 살짝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케이토는 하지메와 놀아주고 있던 곰인형을 방바닥에 급히 내려놓고 에이치에게 달려갔다. 문제집 한 귀퉁이에 피가 두어방울 떨어져 있었다. 아마 커터칼을 쓰려다가 베인 모양이었다. 


 "그러게 좀 조심하지! 기다려봐. 구급함을 가져올 테니까!"


 케이토는 허겁지겁 에이치의 방을 나갔다. 아마 이 집의 가정부에게 물어보면 구급함의 위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케이토가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 1층으로 내려가는 소리가 에이치의 방문 너머로 들렸다. 하지메도 깜짝 놀란 듯 에이치의 손가락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린아이에게 피라는 것은 극히도 두려운 존재다. 


 에이치는 칼에 베어서 아프다는 표현으로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곱게 폈다. 그리고 제쪽을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하지메를 향해 즐겁게 웃음 지었다. 케이토를 제 곁에 붙잡아 둘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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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마코] 슬침연(膝枕緣) 02








 "유키! 너 빨리 안 올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분명 멀리서 부르고 있을 터였는데 어째서인지 코 앞에서 윽박지르는 것마냥 귀가 울렸다. 저 여자는 저 목소리 하나로 이 구역의 관리자가 된 것일 거다. 그렇다는 데에 내기를 해도 좋았다. 이번에 새로 이 구역의 관리자가 된 저 기녀는 참을성이 부족했다. 게다가 엄청난 동성애 혐오자이기도 했다. 그녀가 관리하고 있는 이 구역은 남창들만 모여사는 구역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입에선 저 고운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지독한 말이 끊일 날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저 여자는 

마코토를 유독 싫어했다. 정말이지 마음이 못난 사람이었다.


 마코토는 나갈 채비를 했다. 머릿기름을 조금 더 발라 뻗친 옆머리를 빗질했다. 저번의 관리자였던 기녀는 자주 자신의 머리를 빗어주곤 했다.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마코토를 신경써주며 이별선물로 이 빗을 선물한 아주 선한 사람이었다. 지방의 관리의 첩으로 간다고 했을 때 마코토는 진심으로 그녀의 행복을 빌어 주었다. 기녀의 삶이나 첩의 삶이나 그다지 행복할 거 없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마코토는 그녀가 그 곳에 가서도 그 미소를 유지하기만을 바랐다. 그녀는 기녀 짓을 하기엔 너무나도 성녀와 같은 사람이었다. 그녀가 이 유곽을 떠나서 관리자가 저런 괴팍한 여자로 바뀐 것은 참으로 유감이었지만. 


  "유키 너 이새끼 얼른 안와?"


 다시 한번 복도에서 짜증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키, 라고 불린 마코토는 얼굴을 찌푸리곤 '금방 갈게요'라고 퉁명스레 그녀에게 대꾸했다. 그녀는 그 대답이 마음에 안들었는지 혼잣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큰 목소리로 마코토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같은 남자에게 다리나 벌리는 남창'이라거니 '우리 유곽의 수치'라거니 하는 악질적인 말들이었다. 마코토는 어이가 없어서 픽 웃었다. 너도 남자한테 다리 벌리는 처지인 주제에 뭐가 잘나서 그런 말을 씨부리는 거야?


 마코토는 자리를 일어섰다. 계속 굼뜨게 행동했다가는 저 기녀가 마마에게 악의적인 거짓말을 섞어서 마마에게 고발할 거라는 건 불보듯 뻔했다. 마마는 이 유곽을 운영하고 있는 여자였다. 마마는 서양언어로 '엄마'라는 뜻이라고 했다. 성인 여자 평균에 훨씬 못미치는 자그마한 키를 가진 늙은 여자였지만 그 노련함과 처술은 무시할 게 못되었다. 그녀는 이 유곽거리에서 가장 많은 기녀를 보유하고 있고 가장 많은 단골을 가지고 있는 최고의 운영자였다. 귀동냥으로 들은 정보에 의하면 수도로 올라와 유곽을 차리기 전에는 지방에서 알아주는 기녀였다고 했다. 그녀는 마코토를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딱히 대놓고 뭐라 한 적이 있는 것은 아니였지만, 마코토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초리에서 종종 혐오라는 감정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었다.


 복도로 나가니 얼굴에 잔뜩 짜증을 덕지덕지붙인 기녀가 마코토를 새침하게 째려보았다. 정말이지 마음만 곱게 썼다면 이 유곽에서 세손가락 안에 기녀가 되었을 여자다. 제 손님에게는 그렇게 갖은 아양을 다 떨어대면서 동료에게는 평이 안좋다. 마코토는 방어수단으로 그녀를 향해 살짝 웃어보였다.그녀는 재수없는 것을 봤다는 듯 대놓고 눈썹을 찌푸리더니 이내 휙 돌아서 접대손님이 있는 방으로 마코토를 안내했다. 


 이 유곽은 이 거리에서 제일 큰 유곽답게 복도도 길었고 방도 많았고 구조도 무척 복잡했다. 관리자가 안내를 해주지 않으면 익숙하지 않은 복도에선 쉽게 방을 헷갈리고 만다. 복도에는 다다미가 구김살 없이 깔려있고 방 문 앞에는 홍등이 하나씩 달려 있다. 여기저기 홍등이 켜진 방과 켜지지 않은 방이 보였는데 홍등이 켜졌다는 의미는 일을 치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많은 수의 홍등이 켜진 것 같았다. 여기저기서 교성소리가 흘러나왔다. 대부분은 그녀 '연기'일 뿐인 교성이었다. 이 곳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누가 진심으로 느끼고 있는지, 누가 억지로 교성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 구분할 수 있다.


 대부분은 여자의 교성이었으나 가끔은 굵은 목소리의 남자 것도 들렸다. 사실 이 유곽이 이렇게 까지 성장한 데에는 다른 유곽들이 채워주지 못하는 은밀한 성적취향을 개별적으로 만족시켜주기 위해 다양한 변수들을 마련해 놓았다는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 중에서는 남자를 좋아하는 손님도 있었으며사지가 없는 것을 좋아하는 손님도 있었고 때리는 데에서 흥분을 느끼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맞는 것에서 흥분을 느끼는 손님도 존재했다. 마코토는 그 중에서도 남자를 좋아하는 손님을 맞는 창남이었다. 정말 세상에는 다양한 취향이 존재했다.


" 어떤 방법으로 구워삶았는지는 몰라도 오늘도 그 사람이 널 지명했어. 참 웃기는 사람이라니까? 이 유곽엔 너보다 훨씬 아름다운 여자가 발에 채일정도로 넘쳐나고 너보다 더 귀엽게 생긴 남자애들도 있는데 말이야?"


 여자는 복도를 걸으면서도 끊임없이 마코토 앞에서 그를 험담했다. 그렇지만 마코토는 그녀가 자신을 험담하면 험담할 수록 조금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질투하고 있는 것이었다. 별거 아닌 마코토가 이 구역의 에이스취급을 받고 있는게, 그리고 최근엔 왕족의 마음에 들어버린 것에.


 여자가 말하는 '그 사람'이란 이 나라의 왕족인 '텐쇼인 가'의 사람을 말하는 것이었다. 왕과는 먼 친척 사이지만 왕족이란 이유만으로도 이 유곽에서 그 손님을 특별 취급해주는 것은 당연했다. 딱히 왕족이 아니더라도 돈이 많은 사람이니 분명 특별관리 명단에 올랐을 것이지만. 여튼 마코토도 알게모르게 왕족이라는 이유로 그를 신경쓰고 있었다. 매너없고 제멋대로인 남자였지만 조금만 잘못했다간 목이 날아갈 터였다. 당장 죽여져도 할말 없을 정도로 더러운 목숨이었지만, 그래도 목숨은 소중했다.


 "그럼 지명받아보시지 그랬어요." 

 

 마코토는 빙긋 웃으며 그녀를 도발했다. 보기좋게 그 도발에 넘어가버린 그녀는 얼굴에 형형색깔의 색을 피웠다. 그녀가 꽉 쥔 주먹을 부들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때릴 기세로 주먹을 어깨로 치켜 들었다. 여자의 주먹이라 하더라도 진심을 담아 실으면 꽤 아플 것이다. 마침 마코토는 손님이 기다리고 있는 방 앞에 도착했기 때문에 그녀를 따돌리곤 휙- 방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통쾌했다. 밖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분해하고 있을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니 없던 식욕도 돌 지경이었다.


 "또 뵙습니다, 텐쇼인 아타야마님."


  방에 들어서니 한 쌍의 침구, 촛대 그리고 텐쇼인 아타야마라는 남자가 이미 그 안에 들어서 있었다. 마코토는 일단 차례를 지키려 무릎을 꿇고 그에게 절을 했다. 벌써부터 남자의 눈에는 번뜩이는 욕망이 엿보였다. 참으로 왕족답지 못한 남자였다. 이 나라의 왕인 '텐쇼인 에이치'는 굉장히 기품넘치는 사람이라는 소문이 자자한데 그의 피를 조금이나마 공유하고 있는 저 남자는 어찌 저리 품위가 없는지 모르겠다. 남자는 성미급하게 초에 붙은 불을 거센 입김으로 훅 불어버렸다. 심지에 붙은 미약한 불빛이 한순간에 사그라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마코토는 제 과거를 떠올렸다.









 마코토는 좀 전의 도련님에게 받은 과자 보따리를 소중히 빨랫대아에 넣고 길을 걸었다. 분명 어머니도 초콜릿이란 것을 맛보시면 기운이 나실거란 생각이 들었다. 마코토의 어머니는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었다. 의원도 무슨 병인지 정확히 진단 내리지 못하는 희안한 병이었으나, 마코토는 그것이 마음의 병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어머니는 어렸을 적부터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었다. 가난한 집의 7남매중 막내딸로 태어나 흰 쌀밥 한 번 제대로 먹어 본 적 없었고, 또 도박꾼에게 시집와서 하루도 맘 편해 본 날이 없었다. 마코토의 아버지라는 작자는 한달에 한 번 집에 들어올까 말까하는 난봉꾼이었으며, 그마저 한번 돌아올 때 마다 도박에 쓸 돈을 찾기 위해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곤 했다. 아직 소년의 몸인 마코토에게는 아버지를 막아낼 힘이 없었기에 마코토는 하루 빨리 자라서 못된 아버지를 쫓아내고 어머니에게 효도하며 살기로 마음먹었다.


 어미니가 아프시기 때문에 마코토는 왠만한 집안일은 제가 다 하고 있었고, 이웃들의 빨래를 해주는 댓가로 푼돈을 얻어 조금이나마 살림을 꾸리려 노력하고 있었다. 이 초콜릿이 얼마나 하는 음식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림잡아 짐작건데 이웃집의 빨래를 백번 해줘도 사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코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뿐사뿐 뛰었다. 집이 보였다. 어째선지 시끄러웠다. 집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마코토는 불안해졌다. 설마 아버지가 돌아온 것인가? 아버지가 오지 않은지 최근 두달정도 되었으니 아마 아버지가 돌아왔을 수도 있었다. 어디에서 객사하기를 매일밤 빌고 또 빌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코토는 황급히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제가 없다면 어머니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다.


"어어-. 저기 자네 아들 오는구만?"


 마당에 들어서니 낯선 얼굴의 남자가 마코토를 보고 누런 이를 들어내며 씨익 웃었다. 그 옆에는 언제나처럼 술에 절어있는 아버지가 서있었고 마당바닥에는 마코토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며 통곡하는 어머니가 있었다. 뭔가 평소와는 달랐다. 뭔가 더 기분나쁜 예감이 들었다. 일이 더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머니를 살피니 다행히도 아버지에게 어딘가 물리적 폭력을 당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 찝찝할까?


 "애가 참 곱상하게 생겼네. 사내애 맞아?"

 "하하, 물론입죠. 쟤가 생긴건 지 어미를 닮아 좀 기집애같긴해도 달릴건 다 달린 사내아입니다."

 "음, 뭐 요새 수도에선 저런 얼굴이 인기긴 하니까 말이지. 뭐 특별히 내가 더 쳐주겠네."

 "아이고, 고맙습니다요. 분명 후회하지 않으실겁니다요. "


 남자와 제 아버지는 마코토를 두고 물건 흥정하듯 흥정하기 시작했다. 이내 이가 누런 남자가 마코토의 팔목을 잡아왔다. 본능적으로 이 남자를 따라가면 영영 이 곳엔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것이 느껴졌다. 마코토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어머니는 그 약한 몸으로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며 통곡했다. 하지만 마코토를 도와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남자에게 돈을 받은 아버지가 조용히 하라며 어머니를 때리는 것이 보였다. 마코토는 제발 그러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는 이내 버르장머리가 없다며 마코토에게도 손찌검을 해왔다. 투박한 그 주먹이 멍치를 강타하자 어째서인지 졸음이 밀려왔다. 이러면 안 …돼는데, 내가 어머니를… 의식이 몽롱해졌다. 스르르 눈이 감겼다. 그이후로도 마코토는 죽을때까지 그 곳에 돌아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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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마코] 슬침연(膝枕緣) 01





"이즈미 도련님, 밖에 좀 나갔다 오세요. 분명 또래 친구들을 잔뜩 사귈 수 있을 거라니깐요?"


 유모는 걱정이 많았다. 이즈미와 관련된 일이라면 어느 것이건 걱정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이즈미의 교우관계에 대해 큰 걱정을 해왔다. 이즈미는 유모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실 이즈미에게는 흔히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또래아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교우관계를 쌓지 못한 것은 이즈미 주변엔 가문끼리 잘 알고 지내는 어른들만 넘쳐나는 것이 주된 이유였고 어린아이치곤 조금 포악한 그의 성격도 한 몫했다. 사실 몇번 비슷한 신분의 가문끼리 만남이 있을 때 이즈미와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들이 먼저 다가온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 아이들은 모두 울면서 이즈미의 곁에서 나가 떨어졌다. 그러니 유모가 이런 걱정을 해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였다. 친구는 나이가 들 수록 만들기 어려운 법이었다.


 이즈미는 어제 내린 눈으로 밖이 추워져서 나가기 싫었으나 유모가 결국 외투까지 입혀주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등쌀에 밀려 집을 나설 수 밖에 없었다. 별로 내키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마을을 느리게 걸었다. 겨울이라 짚으로 덮어놓은 밭들은 생명력이라는게 좀 체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시골바닥에서 마을 사람들은 대체 뭘 하고 사는걸까? 라는 안쓰러운 마음이 생겼다. 이 마을의 사람들은 아마 이 마을에서 적당한 사람을 찾아 적당히 이곳에 가정을 꾸리고 이 동네를 세계의 전부로 인식한채 큰 도시한번 나가보지 못한 채로 이대로 적당히 죽어버리고 말겠지.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야.


 이즈미는 입을 비틀어 웃었다. 자신은 이곳의 사람들과는 달랐다. 자신은 왕 다음으로 지위가 높은 귀족 가문의 외동아들이었으며 필히 제 가문을 물려받아 이 안쓰러운 사람들을 지배하는 나라 제일의 관리가 예정이었다. 이 천박한 곳에 머무는 것은 잠시 뿐, 어머니의 허리가 거의 회복되었기에 다음주가 되면 이 구질구질한 동네를 떠날 예정이었다. 그러니까 유모가 바라는 친구같은 걸 그다지 만들 이유가 없었다. 


 앞으로 한바퀴만 더 동네를 돌다가 집에 들어가자- 라고 생각하던 때 우물가에 도착했다. 동네 쳐녀들이 삼삼오오 모여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빨래를 하고 있었다. 겨울이라 살얼음까지 낀 물에 빨래를 하는 것은 꽤나 괴로운 일일텐데 어찌된 일인지 처녀들의 얼굴엔 웃음만이 가득 펴있었다. 아이를 등에 들쳐매고 수다를 떠는 아줌마들도 몇몇 눈에 띄었다. 여자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저들끼리 깔깔대더니 이내 곧 근처에 서있던 이즈미를 발견했다.


 이 시골에서는 흔히 보기 힘든 곱상한 외모의 이즈미를 보며 처녀들은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대충 말을 엿들어보니 '세나가문의 도련님'이라던가 '저 큰 대궐의 도련님'이라던가 자신의 이름을 대신해 부르는 명칭들이 들렸다. 아마 자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시골바닥에서 꽤 유명인사가 되어있는 모양이었다. 시끄러워, 라고 여자들에게 쏘아주고 싶었으나 굳이 나서서 이동네 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기특한 생각도 없었지만.


 "마코토, 저 도련님 너랑 나이또래가 비슷하겠다. 말이라도 걸어봐."

 

 한 처녀가 곁에 있던 아이에게 말거는 소리가 들렸다. 마코토, 라고 이름불려진 소년은 아마 자신보다 한두살 어린 티가 나는 같은 소년이었다. 저 무리의 유일한 남성이기도 했다. 소년은 빨개진 손을 호호 불며 적의없는 맑은 눈으로 이즈미를 바라보았다. 이즈미는 저 맑은 시선에 빠져들어 잠시 생각을 멈춘 채 소년의 눈동자만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씨-익 입을 찣으며 웃는, 아직 풋내나는 소년의 미소에 제가 넋을 놓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곤 얼굴을 붉혔다. 어째서 난 남자 따위한테 아름답다고 생각해버린걸까! 부끄러웠다. 치욕에 가까운 부끄러움이었다.


 이즈미는 등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제가 왔던 길을 더듬어 본가로 향했다. 쿵쿵, 심장이 발걸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뛰었다. 이즈미는 심장의 속도를 따라잡으려고 땅을 박차며 전속력으로 달렸다. 정말이지 귀족의 몸가짐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있는 아버지가 보았다면 품위없다고 한소리 들었을 법한 장면이었다.











"어머. 도련님 나가시게요?"

 

 외투를 제 스스로 챙겨입는 이즈미를 보고 유모는 의외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침 이즈미에게 간식을 가져다 주려 했던 것인지 유모의 두 손엔 양과자와 찻잔이 담긴 작은 소반이 들려있었다. 이즈미는 이 동네에 와서 산 지 반년동안 한번도 제 스스로의 의지로 이 집 밖을 나간 적이 없었다. 어제는 저 어린 도련님을 겨우겨우 등쌀을 밀어서 나가게 한 것이었는데 하루만에 저렇게 스스로 외출준비까지 하고 나가려 하다니. 사람이 하루만에 변하면 큰 일이라던데 …하고 유모는 조금 걱정했다. 이상적으로 바라던 장면이었지만 어쩐지 막상 현실로 닥치니 감동보다는 걱정이 밀려왔다.


" …그 과자 좀, 싸 줄 수 있어?"


 이즈미가 유모의 시선을 조금 피한 채 물었다. 저 어린 도련님은 어릴때부터 부끄럽다고 생각할때마다 시선을 피하는 버릇이 있었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그의 곁에서 그를 가장 많이 겪어온 유모만은 알고 있는 버릇이었다. 왜 과자를...? 설마 도련님께 친구가 생기신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유모는 좀 전까지 하던 걱정이 떨쳐지고 이내 감격으로 마음이 울컥해지는 것을 느꼈다. 도련님께 친구라니! 이건 세나 가문에 길이 남아야 할 소중한 역사적 순간이 아닌가! 하고 조금 호들갑스러운 마음으로 유모는 소반을 들고 주방으로 달려갔다. 이즈미에게 싸줄 과자를 고운 색의 보자기에 담기 위해서. 



 "어? 어제 그 도련님이죠?"


 우물가에는 어제와 같이 소년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다만 어제 삼삼오오 모여 빨래를 하던 시끄러운 처녀 무리들은 보이지 않았다. 저 쪽 고목나무 아래서 몇몇 동네 아이들이 공기놀이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소년은 이즈미를 한 눈에 기억해 냈다. 사실 기억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저렇게 좋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값 비싼 옷을 입을 수 있는 것은 아마 이 마을에서 세나 이즈미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마코토의 옷은 다 헤져서 여러번 천을 덧 댄 낡은 유카타였다. 이즈미는 소년의 말에 별 대꾸를 하지 않고 조용히 소년의 빨래하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처음에는 이즈미쪽을 힐끗거렸던 소년도 이즈미가 별 말이 없자 원래하던 빨래에 집중했다. 찰박찰박, 물소리가 듣기 좋았다.


 이내 소년은 빨래를 끝마친 것인지 몇 번 방망이질을 툭툭해대더니 빨랫감이 담긴 대야를 들고 구부렸던 다리를 펴서 일어섰다. 다리가 조금 저린 것인지 으으-하는 작은 신음을 냈다. 그러곤 아직까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이즈미를 보고 무슨 볼일이?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살폈다. 이즈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소년은 조금 이상한 생명체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이즈미를 한번 훑곤 그를 지나쳐 제 갈길을 가려했다. 하지만 곧 소년의 발걸음은 타인의 힘에 의해 멈춰졌다. 제 어깨를 잡아온 세나 이즈미를 보며 소년은 다시 그 맑은 시선으로 충분히 이즈미를 기다려 주었다. 이즈미가 입을 떼었다. 귀기울이지 않으면 공중으로 분해 될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소년은 참을성있게 이즈미의 목소리에 온 정신을 집중해주었다.


 "저기 …, 과자 먹을래?"


 이즈미가 품 안에 넣어두었던 과자가 담긴 보자기를 내밀었다. 소년의 시선을 약간 피한 채 였다. 귓볼은 감나무에 갓 열린 단감마냥 붉은 기세로 달아올라 있었다. 보자기를 내밀고 있는 오른손은 긴장으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소년은 이즈미의 제안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소년은 자신이 종종 나무를 하러 오른다는 동네의 나즈막한 동산에 이즈미를 데려갔다. 그곳에선 이 마을을 한 눈에 다 담을 수 있었다. 세나가문의 별장도 이 동산에선 막힘없이 다 보였다. 새끼손톱만한 초가집들 사이에 그 집들의 열배는 훌쩍 넘어보이는 자신의 집이 새삼스레 크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꽃이 필때 왔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 아쉽네요."


 소년은 진심으로 아쉬운 듯 했다. 철쭉과 진달래 등이 피는 봄에 이 언덕에서 동네를 바라보고 있으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고 소년이 사족을 덧붙였다. 정말 그럴 것 같았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나이는 아직 아니였지만 소년이 말하니 왠지 정말 그럴 것 같았다. 둘은 눈이 쌓이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이즈미가 가져온 보자기를 풀었다. 형형색색 고운 색깔을 띄고 있는 양과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아무래도 유모가 과자를 더 넣은 것 같았다. 혼자먹기에는 아무래도 많은 양이었다. 초콜릿의 달콤한 향기가 후각을 간지럽혔다. 소년은 초콜릿을 가리키며 이것이 무엇이냐고 이즈미에게 물었다. 약간 소똥같은 색깔이라며 작게 꺄르르 되었다. 이즈미는 소년에게 친절하게 초콜릿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서양에서 즐겨먹는 간식이래. 원래는 카카오라는 열매인데 그걸로 이 초콜릿을 만든다나봐. 나도 카카오라는 열매는 본 적이 없지만 이 초콜릿은 종종 즐겨먹어. " 


 그리곤 별모양이 찍혀있는 초콜릿 하나를 조심히 들어 소년에 입에 신중히 넣어주었다. 소년은 먹는 방법을 모르겠다는 듯 초콜릿을 입에 넣고 한동안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이즈미만을 바라보았다. 이즈미는 소년의 행동에 어깨를 으쓱이곤 제가 먼저 시범을 보이겠다며 제 입에 초콜릿을 하나 넣고 우물우물 빠는 행동을 해보였다. 소년도 이내 그것을 똑같이 따라했다. 그러더니 잠시 혼이나간 듯 혼미한 표정을 지어보이곤 이내 눈물을 글썽였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이예요.."


 생각 외의 반응이 이즈미를 즐겁게 했다. 이즈미는 기분이 좋아져서 남은 과자는 다 너 먹으라고 웃어보인 뒤 보자기를 다시 묶어서 소년의 빨랫대야에 넣어주었다. 소년은 진심으로 감동한 표정으로 몇번이고 이즈미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가진 것은 없지만 제 선물이라며 엉성하게 깍여진 나무인형도 보답으로 건냈다. 사실 이즈미의 집에는 저 나무인형보다 훨씬 훌륭하고 재밌는 장난감이 발에 채일정도로 많이 있었지만 이즈미는 처음으로 남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이렇게 좋은 것은 본 적이 없다며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내일 또 만날 수 있을까?"


 언덕에서 내려와 각자의 집으로 흩어지기 전, 이즈미가 소년에게 물었다. 소년은 물론이라고 대답했다. 다음 날 점심때 쯤에 서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 내일은 더 맛있는 과자를 가져다 주겠노라고 이즈미는 선언했다. 소년은 와아-하고 환호했다. 둘은 이내 큰 길에서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이즈미의 입에서는 아무리 연습해도 잘 되지 않던 휘파람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유모! 정말 다 담았지? 그 쿠키도 담고, 초콜릿도 가득 담았지? "

"어휴, 도련님. 몇번이나 말씀하시는 거예요. 다- 챙겼다니까요. 너무 많이 드시면 살쪄요?"

"상관없어-. 그건 그렇고 젤리도 챙겼지?"


 주전부리를 싼 보따리는 어제보다 훨씬 그 부피가 커져있었다. 이즈미는 보따리를 건네받지마자 신발을 신은 채 그대로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늦게 피운 바람이 더 독하다더니 우리 도련님이 딱 그꼴이구나, 하며 유모는 허허 웃었다. 대체 어떤 친구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까다로운 세나 이즈미 도련님을 저렇게까지 구워삶다니. 정말 보통 사람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즈미는 이내 우물가에 도착했다. 어제 저녁에 눈이 와서 그런지 우물에 소복히 눈이 쌓여 있었다. 우물가에는 어린 여자애 하나가 빨래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는 이즈미와 눈이 마주치더니 이내 얼굴에 홍조를 띄웠다. 아무래도 추위때매 생긴 홍조는 아닌 듯 싶었다. 하지만 이즈미는 소녀에겐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저 어제 마코토가 앉아있던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오늘 더 커진 과자 보따리를 보면 마코토가 어떤 표정을 지어줄 지 즐거운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 흘렀다. 마코토가 조금 늦는 것 같았다. 자신이 너무 빨리 나와버린 것인가? 이즈미는 보따리를 끌어 안으며 조금이라도 추위를 이겨보기 위해 발을 동동 굴렀다.


 



 아낙네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부지런히 왔던 길을 따라 돌아갔다. 벌써 스물여섯번째 아낙네였다. 손을 호호 불어가며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던 단발머리 소녀도 진즉에 가버리고 없었다. 마을 여기저기서 밥짓는 냄새가 솔솔 풍겨와 점심때부터 계속 공복상태인 이즈미의 코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리고있던 그림을 잠시 멈추곤 하늘을 바라보았다. 색붉은 주황색의 노을이 이 포근한 마을을 어머니가 자식을 감싸듯 포근한 모양새로 덮어가고 있었다. 노을이 지고 그 자리를 별들이 촘촘히 매꾸기 시작했다. 수도(首都)에서는 좀 체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손이 찼다. 지문이 쩌억 갈라져 있었다. 이미 감각이 사라져서 별 느낌은 없었다. 아까의 소녀처럼 자신도 손에 입바람을 후후 불어봤다. 결국 소년은 오지 않았다. 과자 보따리는 이미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아 둔 채였다. 왜 너는 오지 않았을까? 너는 바쁜 일이 있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이렇게 널 기다리고 있는데? 넌 내가 널 미워하게 되어도 좋은 것일까? 묻고 싶은 것이 저 하늘의 별만큼이었다. 별이 참 무수했다. 밝게 떠있는 별이 참 미웠다.


"도련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자신의 유모가 제대로 된 외투도 입지 않은채 나와 자신을 찾고 있었다. 유모는 이즈미를 발견하더니 이내 눈물샘을 촉촉히 적셨다. 혹시 도적들에게 잡혀간 것이나 아닐지 안절부절 걱정하던 마음이 이즈미의 얼굴을 보자 안도감으로 변했다. 유모는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이즈미를 향해 뛰어와 어둠 속에 홀로 서있던 이즈미를 품에 꼬옥 안았다. 유모의 품은 따듯했다. 이즈미의 볼줄기를 타고 물줄기가 갸날프게 흘렀다. 몸이 따듯해지니까 흐르는 생리적인 눈물일거라도 이즈미는 생각했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 유모 ... 흐, 읍. 유...모... "


 별이 참 무수했다. 저 별만큼 나는 너를 미워하기로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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