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마코] 마왕님은 나를 너무 좋아하는걸 01








 마왕은 아름다웠다. 아름답다는 말로만 한정짓기에는 송구스러울 만큼, 인간계의 내노라하는 미녀들을 다 데려다 그 아름다운 부분만을 조합해서 하나의 걸작으로 만들어도 저 남자만의 발끝에도 못 닿을 만큼 아름다웠다. 나는 잠시 이 곳이 마계가 아닌 천상계가 아닐까? 하는 고민에 휩싸였다. 손에 쥐고있는 피로 얼룩진 장검이 얼른 마왕의 목을 따버리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 신비로운 마력에 사로잡혀 마왕 앞으로 한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용사양성소에서 교육을 받았을 때가 생각났다. 몇년 전 일이라 흐릿하지만, 아마 그것은 마왕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물들이 인간계를 침범해오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마왕 본인이 인간계로 넘어오는 일은 없었고, 마왕을 잡으러 갔던 용사들은 단 한명 돌아온 이가 없었기에 마왕에 대해서는 소문만 자자할 뿐이었다. 아마 그 때 배우고 있던 책에서는 '마왕은 너무나 용모가 끔찍하여 그 용모를 본 사람들은 기절한다고 한다. 그러니 마왕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흉측한 것에도 단련이 되야 한다.'라고 써져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정 반대였다. 마왕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그것을 본 어떤 사람이라도 몸이 경직된다, 라고 고쳐야 하는 것이 맞다. 내가 인간계에 돌아간다면 그 책의 저자를 찾아가서 이 구절은 잘못되었다고 일러주리라. 물론 살아 돌아갈 가능성은 없어보였지만. 


 솔직히 마왕성에 들어왔을 때는 마왕도 쉽게 생각했다. 잘하면 내가 마왕의 목을 따고 돌아가서 나라의 영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여정이 힘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래봬도 나는 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용사였고, 여기까지 무수한 마수들과 싸우면서 결국 끝에가서는 다 처리했으니 이런 자만감이 붙는게 당연했다. 하지만 마왕을 보자마자 나는 용사 특유의 직감으로 알아 차릴 수 있었다. 이것은 백이면 백 다 지는 싸움이라고. 앞서 물리쳐왔던 집채만한 마수들보다 나와 비슷한 체격을 지니고 있는 저 마왕이라는 남자가, 훨씬 강했고 훨씬 위험했다. 


 아아, 난 이대로 죽는 걸까. 죽음은 각오하고 왔지만 어째서인지 막상 죽어야한다니까 도망치고 싶은 심경이었다. 이대로 도망쳐버릴까? 하지만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여기에 나를 묶어두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게 초인간적인 존재라는 걸까. 수천년을 살아온 마왕에게 수십년밖에 못사는 인간이 덤비기에는 역시나 무리란 말일까. 그래도, 그래도 살고 싶었다. 집에 돌아 갈 수 있다면, 스바루에게 빌려준 돈을 돌려받고 싶었고 호쿠토에게 빌린 책을 돌려주고 싶었다. 그러고보니 아주 오래전에 마오라는 애도 마왕성 토벌군에 합류했다가 돌아오지 못한 일이 있었다. 그 아이도 이 마왕을 봤을까? 아니면 마왕성에 도착하기 이전에 죽어버린걸까?


  " 흐응 -. "


 마왕이 눈을 떴다. 아마 애초부터 잠자고 있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금방이라도 날 덮쳐올 정도로 생생한 기운이 느껴졌다. 마왕은 나를 빤히 쳐다보며 즐겁다는 듯 웃었다. 그 미소는 이미 승리자의 미소였다. 마왕은 져본적이 없으리라, 수천년동안 그 누구에게. 


 마왕, 그는 웃음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존재였다. 

 











[이즈마코] 마왕님은 나를 너무 좋아하는걸 01

                   w. mesk 












 "아 진짜아! 글쎄 이런거 필요 없다니까요? 여자도 아니고 꽃다발이 뭐예요 꽃다발이!"

 "하지만 이건 마왕님이 용사님을 위해, 백년에 한번 핀다는 꽃 암브로스를 꺾어다 만든…"

 "아 글쎄 내가 여자도 아니고! 됐다고요!"


 꽃다발을 다시 받아든 마수의 표정이 슬픈 듯 축 쳐졌다. 그래봤자 인간들의 눈에 보기엔 흉측한 표정이지만. 여하튼 암브로스인지 브로맨스인지 그게 얼마나 귀한 꽃인지는 몰라도, 남자가 준 꽃다발은 결단코 받기 싫었다. 줄거면 아리따운 쭉쭉빵빵한 누님이 주면 좀 좋냐고! 마계에는 예쁜 애도 없냐? 마왕한테 다 얼굴 몰아주기 하고 있냐? 이런거 줄거면 좀 예쁜애한테 시켜서 보내든가, 금방이라도 사람잡아먹을 거 같이 생긴 마수를 통해 전달하는 건 또 무슨 심보래. 나는 축 쳐져있는 마수에게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전한 뒤 문을 쾅 닫아버렸다.


"마코토님.. 이대로 돌아가면 마왕님이 절 죽이실 지도 몰라요.."


 문밖에서 우는 소리가 집안으로 흘러 들려왔다. 알게뭐냐, 마수의 죽음따위 오히려 기쁘거든? 이라고 대꾸해주고 싶었으니 기본적으로 나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다. 어느새 나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 이미 내 손은 문을 열어서 마수에게서 다시 그 꽃다발을 가져가고 있었다. 마수는 방긋 웃으며 '살았다'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봤자 그 웃음마저 흉측하게 보였지만. 하여튼 마수는 제 임무를 다하고 뒤를 돌아 재빨리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저녀석들도 나름 귀여운 놈일지도 … 라고 생각하는 내 머리를 쥐여박고 나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마 용사인 나와 마수인 저들이 어떻게 친하게 지낼 수 있냐, 라고 묻는다면 사건은 위로 거슬러가서 내가 마왕의 목을 따려던 그 시점에서 시작된다. 


 '흐응 -.'


 나는 곧 죽는다고 생각했다. 마왕은 금방이라도 개미를 밟아죽이려는 아이처럼 즐겁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여전히 나는 손가락 마디 하나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저 동공만을 움직여 내가 겁에 질렸다는 것을 온몸으로 알리고 있었다. 마왕은 왕자에서 사뿐히 내려왔다. 그는 합리적이게 오만했다. 걸음걸이 하나에도 나는 최고야, 라는 오만함이 묻어있었지만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에게 다가오는 동안에도 시선은 나에게서 떼지 않은 채로 마왕은 신중히 나를 훑었다. 그리고 내 눈 바로 앞까지 그가 다가오는 순간, 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아름다운 피사체에 대한 경외감에 몸을 부르르 떨 수 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온 인간은 몇 안되는데, 보기보다 실력이 있나보네?'


 마왕은 검지손가락으로 내 턱을 좌우로 돌리며 뜻밖에도 내 실력을 칭찬했다. 방심하게 만든 다음에 죽이려는 속셈인가 이녀석. 하지만 나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다. 죽이고 싶다면 지금 당장 죽여도 될 것이다. 아니면 인질로 삼겠다는 건가? 하지만 나따위를 인질로 삼아서 뭐하게? 나는 일개 용사일 뿐이다. 나라에서 나 하나를 구하려고 귀중한 국력과 돈을 투자할 리가 없다. 


 '이름이 뭐야?'

 '유ㅡ 유우키 마코토.'


 입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였다. 내 이름이 유우키 마코토였나. 머리가 멍해졌다. 마왕의 얼굴이 점점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아름다운 것에 감명한 나는 주륵- 눈물을 흘렸다. 마왕의 입술이 내게 닿았다. 말캉, 생각보다 마왕의 입술은 별 다를 것 없이 인간에 가까웠다.



 "으아아아아아아!! 그거 내 첫키스였다고!!"


 나는 암브로스인지 브로맨스인지 하는 꽃다발을 거실에 아무렇게나 내팽겨쳤다. 그때 일만 생각하면 온몸에 닭살이 오소소 돋고, 얼굴이 벌게지고 개미가 온몸을 기어다니는 것 같은 느낌에 시달린다. 아 진짜 죽어! 얼굴만 예쁜 변태새끼! 예쁘다고 생각한 내 뇌를 뜯어버리고 싶다. 그런 스토커새끼가 뭐가 이쁘다고 으아아아아! 솔직히 가장 죽이고 싶은건 그 키스에 느껴버린 나지만. 누가 그런식으로 키스해 올 지 알았겠냐고! 내 키스 돌려내 이 사이코 마왕자식!




*




 "네?"

 "마계에 다녀오라고. 왕명이다."

 "싫다면요?"

 "음. 이자리에서 당장 네녀석을 죽이는 수 밖에."

 "으아아아! 농담이거든요 농담. 농담도 못합니까?"


 목 바로 앞에 멈춰진 검을 보며 나는 덜덜 떨었다. 쿠누기대장님은 진짜 나를 베어버리기라도 할려는지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낮에는 대장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밤에는 마왕에게 동정을 위협받는 처지라니. 이렇게 불쌍한 처지가 세상에 어딨어, 흑흑흑. 


 "그럼 다녀온다고 한거다?"

 

 네 그럽구말구요. 나는 제발 내 목앞에 있는 이 검 좀 치워달라는 눈빛으로 쿠누기대장님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님은 검을 내 목에서 거둬 칼집에 넣어두더니 이내 툭-하고 무언가를 던졌다. 보따리였다. 응? 이건 왜..


 "자, 갔다와라."

 "지금부터요?!!?! 아니 저 옷가지도 안챙겨왔 …"

 "불만있냐?"


 다시 칼집에 꽂아둔 칼로 손을 가져라려는 대장님의 행동에 '아니요 불만 없습니다, 흑흑'하고 눈물을 흘리며 보따리를 집어 들었다.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 지독한 사람들이랑 엮이는 걸까. 아니 한명은 이미 사람이 아니지만... 얼마 전에 미도리가 저승으로 훅 가는 약을 손에 넣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어디서 구했냐고 좀 물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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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코가] 개와 함께 춤을









 드르륵- 한적한 시골동네에 드물게 거슬리는 소음이 포장도 안 된 길가를 울렸다. 그것은 곧게 다려진 흰셔츠차림의 스바루의 손에 끌려가는 캐리어에서 나는 소리였다. 스바루를 표지판도 제대로 없는 정류장에 떨군 버스는 카랑카랑 낡은 엔진소리를 내며 다음정류장으로 떠나버렸다. 으아 덥다, 스바루는 셔츠의 옷깃을 팔랑거리며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재빨리 하였다. 정자에서 수박을 쪼개먹고 있던 노인들이 이 시골에서 보기드문 새로운 젊은이의 등장에 수근거렸다. 스바루는 붙임성 좋게 그 쪽으로 다가가서 노인들에게 인사했다.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게 중에 스바루를기억하고 있던 노인이 있었는지 이내 손뼉을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스바루 아니여? 왜 있잖여, 고 마당넓은 집 외손주!"

 "아아, 야가 겨여?"


 이내 다른 노인들도 '흐메 많이컸네'라던가 '멋있어졌네-'라며 스바루를 반겨주었다. 스바루의 손에 가장 큼직한 수박 조각을 쥐여준 슈퍼 아주머니는 그중에서도 가장 호들갑을 떨며 스바루 본인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스바루의 과거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도 욕심이 많아서 제 주먹만한 사탕을 볼 양쪽에 두개씩 넣고 다녔다거나 하는 사소한 이야기들이었다. '에에, 제가 정말 그랬어요?' 하고 스바루는 넉살좋게 노인들과 말을 맞추다가 이내 시계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대로 있다간 저녁이 되도 집에 못 들어 갈 것 같았다. 노인들이란 말이 많은 법이니까. 스바루는 일어나서 다시 캐리어를 붙잡고 제 외할머니가 있는 신사로 향했다. 


 외할머니의 집은 마을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뜨거운 뙤약볕아래서 녹초가 된 스바루는 집에 들어오자 마자 마루에 그대로 뻗어 버렸다. 으아아- 여긴 에어컨도 없을 텐데.나 이대로 잘 지낼 수 있을까-따위의 약한 소리를 하던 스바루가 차가운 마루의 냉기에 조금 정신을 차리자 그제서야 일어서서 외할머니를 불렀지만 집 안에서는 아무런 대꾸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디 가셨나? 아니면 뒷뜰에라도 계신가? 뒷뜰에 있는 정원가꾸기가 취미인 외할머니였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스바루는 현관에 있던 슬리퍼를 주워신고 뒤뜰로 향했다. 여전히 뒷뜰가꾸기 취미는 유지하고 계시는 건데, 뒷뜰은 온갖 종류의 꽃들이 만개하게 피어있었다. 어렸을 적엔 저것들의 이름을 다 알았는데 지금은 멍청해졌는지 고작해야 해바라기 정도밖에 모르겠다. 


  "할머니 계세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여기도 아닌가? 혹시 창고에 계신가? 아니면 집 안 가장 끝쪽에 위치한 사당에 계신걸까? 스바루가 어디를 먼저 가 볼까 고민하는 사이 무언가 복슬거리는 게 다리 사이로 지나다녔다. 으앗, 뭐야! 하고 깜짝 놀란 스바루가 자세히 그 복슬거리는 털뭉치를 살펴보니 다름아니라 어릴적에 함께했던 개였다. 언제 이렇게 자랐대, 하긴 여기 마지막으로 온 지도 엄청 오래됐구나.  


 얘 이름이 뭐였더라 …, 하고 스바루는 살이 통통하게 오른 개를 들어올려 이리저리 살폈다. 다, 다이 뭐시기였던 거 같은데 …, 하고 스바루는 가물가물한 기억력을 더듬어 제 눈 앞의 이 생물의 이름을 찾아내려 애썼다. 분명 자신이 지은 이름인데도 어째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기 때 봤던 것과는 다르게 몸집이 훨씬 커져버려서 그런가? 하고 구차하게 이유를 덧붙여봐도 겉모습이 조금 변했다고 애완동물의 이름까지 잊을 정도면 그냥 치매일 것이다. 손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개의 보드라운 몸을 주물거리며 스바루는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다이지? 아냐 조금 이름이 길었던 것 같다. 다이키로? 이것도 아니다. 다이..다이..아, 그래 다이키치! 


 "다이키치!"

 "멍!"


 스바루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탄성과 함께 다이키치의 이름을 부르자 다이키치가 멍! 하고 그에 화답했다. 헥헥- 혀를 내밀고 꼬리를 흔드는 것을 보니 아마 이 이름이 맞는 것 같다. 스바루는 조금 멋쩍어져서 다이키치를 든 손을 쭉 뻗어 비행기를 태웠다. 낑낑- 하고 다이키치가 무서워하자 스바루는 히죽 웃으며 더욱 더 다이키치를 높이 쳐들었다. 껭껭, 다이키치가 약하게 짖었다. 그제서야 스바루는 다이키치를 푹신한 잔디에 내려주었다. 경계의 눈으로 스바루에게서 슬그머니 뒷걸음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미움받아버린 듯 했다. 이내 다이키치는 스바루에게서 등을 돌려 넓은 잔디밭 마당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멀리 사라져버렸다. 에에- . 스바루는 아쉬운 소리를 냈다. 저 아이가 제 손바닥보다 겨우 큰 강아지였을 때는 정성을 다해 보살펴 주었는데, 조금만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미움 받아 버리다니.


 스바루는 다이키치가 사라져버린 쪽을 바라보다 이내 따라가보기로 결심했다. 다이키치가 밟고 지나간 푸른 잔디들은 조금씩 꺽여져 있어서 찾기가 용이했다. 그러고보니 외할머니는 어디 계시는거지? 스바루는 마당에 나온 본 목적을 깨닫고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어디 마을이라도 외출하신걸까?


 스바루는 다이키치의 뒤를 좇다가 창고에 도착했다. 아, 창고다! 어렸을 적에 자주 숨어들어 놀곤 했던 낡디 낡은 창고였다.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할 때 이외에도, 외할머니에게 혼날 것 같은 때면 종종 이곳을 찾아 그 작은 몸을 숨기곤 했다. 여기는 진짜 하나도 안 변했구나 -, 하고 스바루는 키득거렸다.


 집 곳곳에 고집스러움이 남아있는게 제 외할머니와도 같았다. 거의 칠팔년만에 다시 찾는 집이었지만제 어릴적 기억 그대로 일치한다. 흐흐흥- 즐거운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창고의 문이 조금 벌어져 있는 것을 보아하니 아마 다이키치가 이곳으로 쏙 들어가 버린 것 같았다. 아마 잘하면 할머니도 여기 계실지 모른다. 스바루는 끼이익 바닥에 끌리는 녹슨 철제문을 손으로 더 벌려서 그 안으로 들어섰다. 


 멍! 하고 창고 안에서 다이키치의 목소리가 났다. 창고는 창문이 없어서 빛이 안들었기에 스바루는 그 어둠 속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스바루는 더듬거리며 앞으로 몇발자국 나아갔다. 멍! 다이키치가 또 짖었다. 햇빛이 안들어서 그런가, 여기는 엄청 서늘하네…라고 생각한 스바루가 제 앞에 서 있는 사람의 형상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에에, 할머니 여기 계셨어요? 제가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아 …"

 "뭐냐 네녀석은? "


 스바루는 비명 한 번 못지르고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 멍! 다이키치가 기절한 스바루의 주위를 맴돌며 시끄럽게 짖어댔다. 남자는 눈썹을 찌푸리며 기절한 스바루의 볼을 손끝으로 꾹꾹 눌러댔다. 

 "얘가 그 할멈의 손주야? 할멈이랑 다르게 되게 띨띨해보이네." 





(다음편...나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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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코가] 오이디푸스 01




※정확히는 레이아들(라이) x 코가입니다. 





 "라이군은 Y대 법학부에 지원한다고 했었나? 마음이 바꼈다던가 하진 않았니?"


 푸근한 미소를 가진 담임이 학기 초에 조사한 대학희망 종이를 팔랑이며 물었다. 기본적으로 상담가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본직은 화학교사라지만 담임에게는 문과적 소양이 다분해 보였다. 뭐, 그래서 학생들에게 신뢰받고 있는 모양이지만. 나 역시도 담임은 꽤 신뢰하는 편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뭔가 사람을 안정시키는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Y대에 가겠다는 마음에 딱히 변화가 있는 건 아니었기에 굳이 입을 열어 에너지 소모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하긴- 라이군은 성적 좋으니까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부활동만 좀 했으면 더 좋았을텐데. 그나저나 라이군정도면 T대도 가능한데 굳이 Y대에 지원하는 이유가 있니?"


 담임은 조금 아쉽다는 어투로 내가 Y대를 지원하는 이유를 물어왔다. 사실 어릴적부터 법에 관한 관심이 남달랐는데 어느날 Y대의 학생과 인연을 맺게 되면서부터 …라던가 그런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Y대가 집에서 제일 가깝고 그나마 좋은 대학이기에 그 곳에 가려고 하는, 무척 재미없고 무기력한 이유였다. 그리고 법학과라고 쓴 것은 그다지 아는 학과도 없고, 관심있는 분야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사람한테 지나가는 말로 법학과나 지원할까- 라고 했을 때 반응이 좋았던 이유도 있고. 


 "별로 없어요"


 솔직하게 말해버리자 담임은 잠시 당황하는 얼굴이 되었다. 누가 솔직함이 인간의 미덕이라고 했던가. 인간은 어느정도의 위선으로 살아야 미덕있는 인간으로 취급받는 법이다. 교실에서 어린아이들에게 솔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선생들은 모두 나쁜 놈들이다. 솔직하게 살아버리면 평판 나쁜 인간으로 자라버린다. 그 중 하나의 예가 나다. 나는 그다지 거짓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거짓말을 꾸며내는 것은 귀찮다. 그리고 이 예의없는 솔직함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이 외모로 용서되는 사회다. 


 내가 말하기에는 조금 재수없는 내용이지만 나는 겉껍데기만은 훌륭하다. 아마 일본 전역에 있는 기획사란 기획사의 명함은 다 받아 봤을 것이다. 나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 주변에는 내 팬클럽이라는 것이 공공연하게 있는 모양이다. 신발장에서 신발을 갈아신고 있거나 수돗가에서 땀을 식히고 있으면 어디선가 셔터소리가 한두개씩 들려온다. 뭐, 나에게 관심을 가져오는 것은 귀찮긴 하지만 그것을 작정하고 쫓아내는 것은 더더욱 귀찮은 일이므로 가만히 두고 있었다. 이 외모가 가져오는 이점은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얼굴이 지독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매일아침 거울을 보며 커터칼로 얼굴을 북북 그어버리는 망상을 할 만큼.

 

  이 얼굴은 나의 부친인 '사쿠마 레이'에게서 고대로 물려 받은 것으로, 내 부친의 생전 동창이었던 카오루씨는 가끔 날 보면 '진짜 사쿠마씨 판박이잖아...물론 성격은 반대지만.'이라는 말을 해왔다. 언젠가 봤던 부친의 졸업앨범에선 정말 나와 똑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에 내심 놀랐었다. 그만큼 닮았던 것이다. 우리 둘은.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은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너무 기분 나쁘게 똑닮아있었다. 차이점은 언제나 올라가있는 아버지의 입꼬리와, 언제나 세상 일에 무력한 듯 살짝 내려간 나의 입꼬리 정도가 아닐까. 차라리 평범하게 생겼던 엄마 쪽을 닮았으면 좋았을걸. 그리고 내가 이 외모를 싫어하는 진짜 이유는 …


 






 "왔냐 라이? 오늘 저녁은 카레다."


 현관을 열자 앞치마를 두르고 밥주걱을 든 오오가미가 보였다. 아마 지금 막 밥을 푸려던 중인 것 같았다. 연두색의 앞치마에는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지역의 마스코트가 그려져 있었다. 방긋웃고 있는 강아지 캐릭터가 '어서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삼년은 넘게 쓴 앞치마라 조금 너덜거렸지만 그래도 난 저 앞치마가 참 좋았다. 오오가미와 아주 잘 어울렸다. 


 "오늘은 좀 늦었다? 혹시 학교에서 괴롭힘당하냐?"

 "내가 넌 줄 알아? 담임이랑 상담했어"

 "이자식이 또 싸가지없게 반말이나 찍찍해대는거 봐라.." 


 오오가미는 내 머리에 주먹을 쿵- 쥐여박았다. '어렸을때는 꽤 잘따랐는데…'하면서 혀를 쯧쯧차며 시선을 올려 나를 째려봤다. 삼년 전에는 내가 오오가미를 조금 올려보아야 했는데, 어느샌가 오오가미가 날 올려다 봐야하게 됐다. 이것이 삼년 간 우리 관계의 진전일까, 라고 나는 조금 씁쓸한 기분이 되었다. 


 "이젠 내가 더 키도 크잖아. 오오가미는 오오가미로 충분해."


 조금 꿍해져서 오오가미에게 툴툴거리니 오오가미의 눈이 잠시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갸웃거리며 내 이마를 제 손바닥으로 집어보더니 '열은 안나는데..'하고 중얼거렸다. 아마 최근 더욱 심해진 나의 투정이 오오가미에게는 어디가 아픈걸로 비춰지는 모양이었다. 바보. 멍청이. 오오가미는 멍청하다. 가끔 국에 설탕과 소금을 구별하지 못해서 설탕을 부을 만큼 멍청하다. 서른 후반의 나이가 되었어도 무서운 영화 하나 제대로 보지 못할 만큼 멍청하다. 언젠가 곰국을 끓이다가 외출해서 집을 홀라당 태워버릴뻔 했을 정도로 멍청하다. 그리고, 이제는 너에게 존칭하지 않는 이유를 모를 정도로, 정말로 오오가미는 멍청하다. 








 "이제 곧 있으면 니 부모님 기일이네. 금요일인거 같던데. 학교끝나고 바로 올 수 있냐?"


 카레는 조금 싱거웠다. 후각이 예민한 오오가미는 향신료가 강한 요리는 항상 싱겁게 만들었는데, 그래서 나는 오오가미가 만든 카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본인에게는 말하지 않아서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밑반찬으로 나온 마늘장조림을 젓가락으로 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으로 나는 귀가부였고, 방과후에 딱히 삼삼오오 모여서 어디를 놀러가는 체질도 아닌 것이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부모 기일에 얼굴조차 내비치지 않는 것은 낳아준 부모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나의 부모는 가을이라고 부르기엔 외투를 껴입지 않으면 안되는 이 늦가을에 죽었다. 사인은 교통사고였다고 한다. 둘은 교토로 단풍을 보려 내려간 모양이었고, 그 곳에서 취객이 운전하는 차에 들이받혀져 그대로 그자리에서 즉사했다고 한다. 그때 나는 오오가미의 집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얼굴로 딸랑이나 가지고 놀면서 있었다. 아무래도 너무 어린 나를 데리고 긴시간 차 여행을 가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던 내 부모님의 처사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천만다행으로 살아남았다. 아니, 사실은 그때 죽어버리는 것이 좋았을까?

 

 원래 내 부모의 재산도 상당했거니와, 보험금까지 나와서 솔직히 나는 고아치고는 분에 넘칠듯한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예전에 부모님이 살던 집은 너무 커서 이미 예전에 처분해버렸지만, 지금 살고있는 이 집도 두명이 살기에는 엄청난 낭비라고 생각 될 만큼 컸다. 실질적으로 이 집을 계약한 오오가미의 말로는 이 집의 정원이 레온이 뛰어다니기 좋을정도로 커서 이 집을 골랐다고 한다. 정말 단순한 이유였다. 


 지금 그 레온은 죽고 없어서, 마당 한 켠에는 빈 개집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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