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이 시끄러웠다. 지금 체육시간이려나. 마오는 얼굴을 책상에 박고 엎드려 시간표를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로, 아마 이 쯤이면 체육시간이겠네- 하고 어림잡아 짐작했다. 사물함 쪽에서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 남자애들의 고함에 가까운 말 주고받기, 교실밖을 우당탕 뛰어나가는 소리 등이 난잡하게 섞여 마오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아마 체육시간이라 체육복으로 다들 갈아입는 모양이었다. 마오 자신도 체육수업에 나가기 위해서는 교복을 갈아입어야했으나, 마오는 지금 모든 것이 다 무력해졌다. 무단 결석이건 뭐건 될대로 되라지. 체육복을 다 갈아입은 급우들이 하나 둘 교실을 빠져나가자 소음이 점점 사그라 들었다. 마오는 교실 한 가운데서 덩그러니 혼자 남겨졌다.
그러니까, 코가의 히트사이클이 있던 그 날,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리츠를 좋아하고 있었는지 깨달아버린 그 날부터 마오는 이렇게 무기력하게 하루 시간의 대부분을 엎드려서 보냈다. 자신의 이런 행동은 아라시한테 걱정을 끼쳐버린 모양이었지만 아라시가 보약 한두첩 가져다준다고 해결 되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마오는 뒤늦게 상사병을 앓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놈으로다가.
마오와 리츠와의 관계는 아직 싸운 그 날 이후로부터 진전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코가가 히트사이클 이후로 일주일 정도 학교를 나오지 않았을 때에는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리츠도 아예 결석하는 날이 잦았다. 그래서 벌써 말 한마디 붙여보지 못한 것이 몇주째더라..좋아한다고 인식한 상대와 말 한번 제대로 나눠보지 못한다니, 나는 무슨 이차원의 여자아이와 연애하는 거냐고. 아니 차라리 그 쪽이 더 낫겠다. 이차원 여자아이들은 속마음이라도 알기 쉽지, 리츠는 …,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일까. 뭐, 언제나 별 생각없이 흐르는 대로 사는 놈이니까 이 상황에 대해서도 별 생각 없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화가 나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혼자서 끙끙되고 있는데 사실 그녀석은 아무 생각도 없을거라고 생각하면… 자신이 너무 비참해진다.
"이사라, 네 녀석 언제까지 엎어져있을 생각이냐. 얼른 나가라. 문 잠궈야 해."
이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오오가미 코가의 목소리였다. 이번주 주번인 코가는 체육수업을 위해서 문을 잠궈야만 했는데 이사라가 도무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마오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었다. 코가는 한 손으로 열쇠를 허공에 던졌다 잡았다를 반복하며 자기딴에는 꽤 참을성 있게 마오가 일어나길 기다렸다. 하지만 깊게 잠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파서 저러고 있는지 계속 책상에 엎드려있기만 한 마오의 모습에, 조금 걱정된 코가가 조심스레 마오의 어깨를 흔들었다.
"어이, 이사라. 너 자..."
"오, 오가....미...."
"야, 너, 너 왜 우냐? 많이 아프냐? 야, 아프면 양호실을,"
고개를 든 동급생의 얼굴이 눈물 콧물 범벅이어서 코가는 뒤로 물러서며 흠칫했다. 아마 어디가 아픈 모양이라고 생각한 코가가 걱정된다는 얼굴로 양호실에 갈 것을 권했지만, 마오는 다 큰 남자애가 타인 앞에서 운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도 잊은 것인지 서럽게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둘 뿐인 반이 떠나가라 시끄럽게 울어대는 마오의 행동에 제가 울린 것도 아닌데 괜히 안절부절하게 된 코가가 마오의 두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댔다.
"이사라 왜 그래! 정신차려. 선생님이라도 불러줄까? 야, 너 괜찮은 거냐?"
"흐어어엉, 이 나쁜놈아. 사쿠마랑 하니까 좋더냐!"
한순간 마오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대던 코가의 손이 얼음처럼 굳었다. 그리곤 무척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마오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봐왔다. 코가의 눈빛은 마치 '네 녀석, 그걸 어떻게…'하고 말하는 것 같아서 마오는 점점 더 서러워졌다. 것봐, 얘네 했잖아. 사쿠마 이 나쁜 자식. 천하의 바람둥이자식! 내가 좋달 땐 언제고 한순간에 휙하고 다른 놈으로 갈아타는 거냐. 막말로 내가 코가보다 못한 게 뭔데! 내가 더 상냥하고, 내가 더 너랑 오래했고, 그리고 내가 더 널 좋아하는데, 흐어어엉. 진짜 부질없어. 아무리 잘해줘봤자 다 부질없다고. 으아아아, 호모가 되려면 혼자 될 것이지 왜 나한테까지, 책임 지지도 않을 놈이, 진짜로, 아아아, 진짜 싫어, 진짜, 진짜!
"내가 너보다 리츠를 더 좋아하는데, 흐어엉, 진짜, 내가 훨씬 오래전부터 함께 했는데!"
"리…츠?"
"아 이젠 그 이름도 듣기싫어! 몰라, 이제 니들끼리 맘대로 해! 내가 다 키워놨더니 어디서 굴러온 돌맹이가, 흐어어엉, 진짜"
"돌,맹이? 야, 그리고 니가 오해하나본데..."
"아 몰라! 내연녀의 이야기따위 듣고싶지 않아!"
"넌 뭐가 이렇게 고집불통이냐! 야, 좀 사람 말 좀 끝까지 들어라! 야 나 리츠랑 그런 사이 아니거든?"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마오의 난리브루스에 머리가 아파진 코가가 마오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 얘 이런 캐릭터였나? 우리 반에서 유일하게 정상에 가까운 캐릭터 아니었어? 요새 무슨 지랄병바이러스라도 유행하고 있는 건가. 내가 사쿠마 리츠랑 했다니 이건 또 무슨 거지발싸개같은 소리냐. 억울하게 오해를 사고있는 것 같아 갑자기 울컥한 코가가 마오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아니 넘겨 짚는 것도 정도가 있지, 무슨 내가 릿치.. 아, 설마 최근에 릿치랑 좀 친하게 지냈다고 이러는 건가? 하지만 그 자식은 이사라랑 최근에 싸운 모양이어서 아침에 깨워줄 사람도 없는 모양이고, 흡혈귀자식은 릿치한테 미움받고 있어서 같이 등교하지 못하는 상황이니까 부득이하게 흡혈귀한테 부탁을 받아서 등하교를 책임져주고 있을 뿐이었고, 그 이상의 관계는 전혀 네버 아니었다. 그런데 등하교 좀 같이 했다고 내연녀니 뭐니 하는 소리나 듣고 앉아있다니. 나 이거 얘 고소해도 할 말 없는거지?
"리츠랑 그런 사이 아니라니, 뭐야 엔조이라는거냐!"
"와, 하다하다 이런 미친 소리를 다 듣고. 야! 나 리츠랑 안했다고! 니 뇌는 나랑 리츠랑 어떻게든 엮고 싶어서 어떻게 된거냐고!"
"하, 하지만 너 양호실에서... 나 다 들었는데."
"시..발, 전교에 사쿠마 녀석이 릿치 하나냐고!"
무슨 소리야. 마오가 잠시 이해가 안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자신보다 한 학년 위의 '사쿠마 레이'의 존재를 떠올렸다. 아, 설마. 헐, 설마. 너, 설마. 야, 너, 어? 야, 이게 아닌데. 헐, 야 뭐야. 그러니까 레이선,배랑. 헐? 그러니까, 나, 나 혼자, 지금 뻘, 뻘,뻘짓한거..라고? 방금전까지 제가 코가에게 했던 말들이 주마등처럼 머리에 스쳐지나갔다.
어, 음. 일단 리츠랑 그런 사이는 아니었다니까 다행이긴 한데.. 이건 이것 나름대로 충격인데?
"아, 야, 어, 미안, 헐, 미안, 둘이 그런 사이일줄은. 아, 맞다. 너 사쿠마 선배 빠돌이였지?"
"빠돌이는 누가 빠돌이라는 거야! 아오, 진짜 이게! 야 너 때문에 체육…"
못 나가고 있잖아! 라고 소리치기 전에 뒷문이 드르륵- 열리며 체육복을 입은 한 무더기의 동급생들이 우수수 밀려들어왔다. '아 뭐야! 자습이라니! 아오! ' '시험이 아직 이주나 남았는데 자습은 무슨 자습이야!'라고 불평섞인 목소리들이 들려오는 것을 보니 아마 체육이 자습으로 교체된 모양이었다. 교실에 들어오던 학생들은 교실 한 가운데서 요상한 모양새로 단 둘이 독대하고 있던 마오와 코가와 마주쳤다.
"야 뭐야 니네 둘이 교실에서 뭐하냐 ㅡ?"
"유후- 분위기 좋은데! 야 니네 둘이 사귀냐!"
동급생들은 재밌는 건덕지가 생겼다는 듯 휘파람까지 불어오며 코가와 마오를 놀려왔다. 누가봐도 장난섞인 행동이었기에 마오는 잠자코 웃기만 할 뿐이었지만, 한창 마오 때문에 짜증이 나있던 코가는 동급생들이 자신을 놀려오자 약이 머리끝까지 올라 이내 귓볼까지 붉어진 얼굴로 동급생들을 향해 교실이 떠나가라 고함을 질렀다.
"야 내가 얘랑 왜사귀는데! 얜 리츠 좋아한대거든? 아오 진짜 하다하다 별 것들이 다!"
"누가 누굴 좋아해?"
"누구긴 누구냐! 이자식이지! 이사라가 사쿠마자식이 너무 좋아서 돌아버리겠단다! 지가 훨씬 더 전부터 좋아했댄다! 아오! 치정싸움은 지들끼리 할 것이지, 왜 남한테 다들 지랄인거야!"
어, 저기, 오오가미야? 잠깐 그 입 좀 다물어 줄래..? 마오는 당장에라도 죽고 싶어졌다.
*마오가 캐붕...이 일어났네요, 죄송합니다.
아마 다음편이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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